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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호/한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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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는 토목공사로 강줄기 말라가고 빗물은 숲과 땅에 스미지 못해
와락 홍수로 쏟아지거나 바짝 마르거나 토건국가에선 ‘치수’도 ‘이수’도 ‘삶’도 얕아져
생활 속의 문화사회학
“최근 수십 년 동안 매년 여름에 폭우가 쏟아져, 떠밀려 내려온 토사가 점점 무더기로 쌓이게 되었다. 물이 제 길을 잃고 옆으로 흘러 넘쳐서 그 지역은 그대로 허허벌판이 되어버렸다. 지나가던 사람이 제방을 쌓으려 했다가도 그 일에 드는 공력을 계산해보고는, 바다를 바라보는 것 같아 아득한 기분으로 돌아서 버린다.” (박제가 [북학의] 중에서)
인류의 여러 신화들 속에는 대홍수 사건이 자주 등장한다. 순식간에 삶터를 삼켜버리는 커다란 물난리는 예나 지금이나 천지개벽에 버금가는 사건일 수 있다. ‘수마(水魔)’라는 말마따나 물은 인간의 능력을 훨씬 넘어서는 괴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나 사회는 막강한 권력을 획득하게 된다. 많은 문명과 국가가 바로 ‘치수(治水)’를 통해 성립하였다. 그런데 물을 다스린다 함은 수재를 방지하는 것만이 아니다. 물은 생계에 필수불가결한 자원이다. ‘이수(利水)’는 삶의 풍요로움으로 직결된다. 일찍이 비트포겔이라는 학자는 강우량이 많은 몬순 지대에서 많은 물을 끌어다가 미작 농업을 발달시켜온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을 가리켜 ‘수리(水利) 사회’ (hydraulic society)라고 칭한 바 있다.
그러나 물의 의미는 그런 도구적인 속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물 그 자체를 좋아 한다. 한국에서도 강은 중요한 여가 공간이다. 뱃놀이, 답교(踏橋), 탁족(濯足), 유두(流頭) 등 전통 민속에서 현대의 각종 첨단 수상 레저 스포츠에 이르기까지 강은 다양한 놀이의 무대가 된다. 또한 물에 몸을 적시지 않고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안온한 휴식을 얻을 수 있다. 겸재가 남긴 진경산수화 <압구정>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선조들은 강변의 정자에서 풍광을 음미했다. 풍경화를 ‘산수화(山水畵)’라고 일컬을 만큼 동양에서는 강을 자연의 핵심 요소로 여겼다. 물과 자연스럽게 사귀는 ‘친수(親水)’의 문화는 오랜 역사 속에서 다양한 형식으로 면면이 이어져온 것이다.
그런데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인간과 강 사이의 거리는 멀어졌다. 경제 성장에 수반하여 폭증한 공장 폐수, 갑자기 불어난 도시가 쏟아내는 생활하수로 인해 점점 더러워졌다. ‘개천에서 용난다’는 비유가 나올 만큼 ‘열린 냇물’은 불결한 이미지로 굳어져 갔다. 그런데 정부 당국은 수질을 개선하고 건전하게 관리하기 보다는 복개함으로써 외형적인 위생과 경관을 정비하는 쪽으로 대응했다. 그로 인해 도시인들의 시야에서 시냇물은 더욱 멀리 사라져갔다. 퐁당퐁당 돌을 던져 냇물이 멀리 멀리 퍼져나가는 광경을 아이들은 다만 노래에서만 상상할 뿐이다.
복개되지 않은 큰 강에서도 물과 사귀기는 쉽지 않다. 콘크리트 호안 블록과 아파트로 둘러싸인 한강변은 삭막하다. 그곳에 이따금 일본인 관광객들이 찾아온다. 욘사마가 한강을 배경으로 하는 사진에 싸인을 해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한국의 드라마에서 주인공들이 한강에서 산책을 하거나, 슬픔을 가득 안고 흐느끼는 모습을 종종 보았던 영향도 있다. 그런데 뭔가 독특한 분위기를 기대하며 먼 길을 찾아온 방문객들에게 한강은 허전하다. 유람선이나 오리배를 타고 한강 고유의 정취를 맛보기는 어렵다. 거기에 ‘한류’는 흐르지 않는다. 그 위대한 자연 유산에 다시금 문화의 옷을 입히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 한명회가 한강을 내려다보며 맛보던 운치와 풍류를 압구정에서 재현할 수 있을까.
다행히 강을 새롭게 발견하고 되살리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많은 지자체들이 강의 옛 모습을 복원하거나 생태 하천으로 재정비한다. 서울의 양재천과 청계천, 경기도의 안양천, 울산의 태화강 등의 사례가 주목을 받는다. 지난 해 태화강 수영대회에 참여한 시민들은 은어와 부딪히며 헤엄을 치는 진기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도심에 물이 다시 흐르면서 열섬 효과가 줄어들고 녹지 공간이 늘어난다. 거기에 소공원이 조성되고 다양한 음지 식물들이 자라나면서 새와 곤충들이 찾아든다. 그것은 자연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아이들에게 멋진 놀이터가 된다. 또한 강변으로 유쾌하게 이어지는 자전거 도로를 활주하면서 마주치는 풍경은 영화에서 보았음직한 장면들의 파노라마다. 그렇듯 쾌적한 삶의 질을 제공해주는 하천 프리미엄을 끼고 인근의 아파트들은 점점 값이 오르고 있다.
그러나 국토를 금수강산으로 가꾸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장애가 아직 많다. 강변이나 계곡에 들어서는 각종 행락 시설들로 인해 수질이 나빠지는 강이 적지 않다. 그리고 더욱 근본적으로는 끊임없는 토목 공사로 인해 강물 자체가 줄어드는 건천화(乾川化)가 심각하다. 도로나 건물이 늘어나면서 나무가 줄어들고 콘크리트 피복률이 높아진다. 그래서 원래는 비가 오면 그 물이 숲과 땅에 스며들어 있다가 서서히 흘러나오는데, 이제는 한꺼번에 홍수로 쏟아져나가고 강은 곧 바짝 말라버리는 것이다. 그 결과 예전에는 무릎까지 차던 냇물이 이제는 발목에서 찰랑거린다. 기존의 토건 패러다임으로는 치수와 이수가 지속가능하지 않다. 흙과 나무(土木)를 살리는 방향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국토의 풍수는 계속 일그러질 것이다. 친수(親水)의 근본 전제인 강 자체의 존속이 위협 받는 현실은 생활 문화의 빈곤화를 예고한다. 얕고 엷어지는 강물처럼 우리의 얼도 천박해져가는 것인가. ‘물이 깊어야 큰 배가 뜬다 / 얕은 물에는 술잔 하나 뜨지 못한다 / 이 저녁 그대 가슴엔 종이배 하나라도 뜨는가(...) / 얕은 물은 잔돌만 만나도 소란스러운데 / 큰 물은 깊어서 소리가 없다’ (도종환 ‘깊은 물’) 시인은 우리의 자화상과 소망을 강물에서 넌지시 읽어내고 있다. 오늘 마음 한 구석에 잔잔한 시냇물 한 줄기 열고 싶다. 거기에 하얀 쪽배 하나 띄우고 싶다. 잔잔한 은하(銀河)를 건너 푸르른 하늘로 나아가는.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우리 주변의 일상적 소재들을 독특한 시선으로 포착해온 김찬호 한양대 강의 교수가 이번 호를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김 교수는 “지난 1년이 제게는 깊은 공부였고, 저의 지적인 정체성을 탐구하는 즐거운 여정”이었다는 소회를 밝혔습니다. 지면을 빛내주신 김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면은 곧 새 필자가 새로운 연재를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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