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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7.12 11:14 수정 : 2006.07.12 11:14

한중연 전경목 교수팀 완역본 선봬

유서필지(儒胥必知). 글자 그대로는 유자(儒者)와 서리(胥吏)는 모름지기 알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유서필지'는 이런 명령형 문장을 그대로 제목으로 뽑아 쓴 조선후기 저술 중 하나이다.

그렇다면 유자와 서리가 모름지기 알아야만 하는 대상은 무엇인가?

그 범례(凡例)에는 그것을 이렇게 규정한다.

"문장(文章)을 배우는 사람은 문장의 문체를 숭상하고, 공령(功令)을 공부하는 사람은 공령의 문체를 익히며 서리(胥吏)의 일을 배우는 사람은 서리의 문체를 배운다. 이른바 문장의 학문(文章之學)은 서(序)ㆍ기(記)ㆍ발(跋)ㆍ잡저(雜著) 등의 문체를 말하며, 공령의 학문(功令之學)은 시(詩)ㆍ부(賦)ㆍ표(表)ㆍ책(策)ㆍ의(疑)ㆍ의(義) 등의 문체를 말한다. 서리의 학문(胥吏之學)은 단지 문서나 장부에 그치지 않는다. 상언(上言)ㆍ소지(所志)ㆍ의송(議送)과 같은 문체 또한 모두 서리가 알아야 한다. 하지만 이는 서리만이 알아야 할 일이 아니며, 모든 관리 또한 반드시 알아야 한다."

문장이란 지금으로 본다면 문학에 가까우며, 공령(功令)이란 과거시험에 쓰이는 여러 문체, 즉, 과문(科文)의 별칭이니 공령의 학문이란 과거 시험을 준비하는 학업이다.

정확한 편찬시기와 편찬자는 알 수 없으나 철종시대 연간에 나왔다고 간주되는 '유서필지'는 이처럼 서리라면 모름지기 갖춰야 하는 문서 작성 기술을 문학작품을 짓는 능력이나 과거시험 준비를 위한 학문과 같은 반열로 끌어 올리고 있다.

나아가 문서작성기술은 서리 뿐만 아니라, 양반사대부라면 모름지기 알아야 함을 역설한다.

이에 걸맞게 '유서필지'는 조선후기 일상생활에서 자주 맞게 되는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작성하는 각종 문서를 7가지 종류로 나누어 그 작성 방법을 다양한 사례 중심으로 소개한다.


한국법제사 전공이지만, 국내에서 손꼽히는 고문서 연구자인 박병호 서울대 명예교수 겸 한국학중앙연구원 초빙교수는 이런 특성을 감안해 유서필지를 '조선시대 문서 작성의 길라잡이'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소개하는 문서는 모두 7가지. 국왕에게 직접 청원하는 상언(上言), 국왕이 바깥으로 거동할 때 직접 징이나 북을 치며 그 행렬을 멈추게 하고 억울함을 호소하는 격쟁원정(擊錚原情), 백성이 관할 지방수령에게 올리는 소장(訴狀)인 소지(所志), 제수(祭需)나 부의(賻儀)를 전할 때 함께 보내는 단자(單子), 서리가 수령 등에게 올리는 고목(告目), 거래계약서인 문권(文券), 어떤 사실을 알리는 통문(通文)이 그것이다.

한국고문서 전공인 전경목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그래서 이런 유서필지를 '공문서ㆍ사문서 서식을 예시한 사례집'이라고 설명한다.

여기에 소개된 각종 서식을 분석하면 조선시대 생활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어떤 분쟁에 휘말렸으며, 어떤 쟁송이 벌어졌고, 나아가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과정은 어떠했는지 등등을 엿볼 수 있다.

가장 많은 사례로 언급되는 분쟁이 산송(山訟). 즉, 저 산 이 산 소유주가 누구인지를 다투는 쟁송을 산송이라 하는데, 조선후기 '법조계'는 산송 전성시대라고 할 만큼 이런 소송으로 각 관청이 들끓었다. '당쟁망국론'이라는 말이 있는데, 실상 조선후기 세태는 '산송망국'이라 규정할 만하다.

하지만 여타 조선시대 문헌에서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 사회상을 풍부히 담고 있는 유서필지는 그럼에도 그렇게 대접받지는 못하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두(吏讀) 교과서쯤으로 통용되곤 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이 유서필지 부록에 수록된 '이두휘편'(吏讀彙編)에서 비롯됐다. 이곳에는 당시 공문서 사문서에서 자주 쓰이는 이두어휘 244개를 1글자로 된 일자류(一字類)에서 7글자로 된 7자류(七字類)로 분류해 그 의미와 발음을 달아놓았다.

유서필지를 학문의 대상으로 제일 먼저 주목한 이는 일본인 연구자들이었다. 식민지 조선에서 각종 업적을 쌓은 그들 중 마에마 고사쿠(前間恭作)와 아유가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 오쿠라 신페이(小倉進平) 등이 그들인데 공교롭게도 이들은 모두 언어학자다. 나아가 이들은 그 이전에는 아무도 해독하지 못한 신라 향가 연구에서 지금도 지워질 수 없는 학문적 성과를 이룩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향가 해독을 위해 이두를 주목했던 것이며, 그 과정에서 유서필지, 더욱 정확히는 그 부록인 이두휘편을 발견하고는 쾌재를 불렀던 것이다.

하지만 최근 역사학계와 경제사학계를 중심으로 고문서가 제3의 사료로서 거듭 각광을 받게 되면서 유서필지 또한 조선후기 사회를 보는 창의 하나로 급속히 부상하고 있다.

전경목 교수가 한국학중앙연구원 고문서실 김건우ㆍ김동석ㆍ심영환ㆍ전영근 씨와 합세해 최근 완성본을 내놓은 '유서필지'(사계절)는 이 문헌에 대한 해제본이자 완역본이다. 이들이 이 유서필지에 얼마나 공을 쏟았는지는 책 편제에서 금방 드러난다.

펼침면 왼쪽에는 번역문을 수록했으며 그 맞은편 오른쪽에는 그에 해당하는 원문을 수록했다. 원문은 활자체가 아니라 목판본 서체를 그대로 사용했다. 여러 종류가 알려진 유서필지 판본 중에서도 이번 완역본은 전주에서 임신년에 발간됐다 해서 '임신완서본'(壬申完西本)이라 일컫는 판본을 저본으로 삼았다.

원문에는 원래 표점(끊어읽기 등의 구두점)이 없으나, 번역자들이 일일이 찍었다.

언젠가는 나왔어야 할 유서필지 완역본이 마침내 우리 앞에 섰다. 405쪽. 3만3천원.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김태식 기자 taeshik@yna.co.kr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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