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워츠는 렘브란트가 소송을 통해 아들의 보모였던 정부 헤이르체 디르흐를 정신이상자로 몰아 가두었던 사실을 지적하며 최소한 이 사건에서 렘브란트는 매우 잔인했다고 지적했다. 슈워츠는 1984년 그가 발간한 "렘브란트 : 생애와 그림"을 저술할 때 토대가 된 500건 정도의 자료를 연구하며 렘브란트 인간성의 어두운 측면이 사가들에 의해 감춰져 왔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렘브란트가 가족이나 채권자, 후견인, 심지어는 그림의 모델들과 일으킨 다툼이 자신이 알고 있는 것만도 25건이나 된다고 밝혔다. 슈워츠는 지난달 발간한 그의 신간 "렘브란트 북"에서는 렘브란트에 대한 평가를 다소 누그러뜨려 그가 단지 "타협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으며 이런 성격이 문제를 일으켰으나 예술에는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렘브란트에 관한 세계 최고의 연구센터인 렘브란트연구프로젝트(Rembrandt Research Project)를 이끌고 있는 에른스트 반 데 웨터링은 "사람들이 렘브란트에 대한 기존 이미지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으로 그를 보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렘브란트가 그림에 대한 불 같은 정념으로 최고의 창조성을 이룩했던 불우한 화가라는 일반의 생각은 사실과 다르다고 말했다. 렘브란트는 다만 그림으로 성공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던 화가였다는 것이 그의 평가다. 렘브란트는 역사화나 성서의 일화를 주제로 한 대작을 그릴 때 수많은 연습 스케치를 해가며 빛의 효과와 얼굴 표정 등을 연구하고 이를 토대로 대작을 완성해가는 그런 스타일이었다는 설명이다. 렘브란트는 결코 가난과 싸워야 했던 화가는 아니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명성을 얻었고 주문이 끊이지 않았다. 다만 돈 관리에 실패하고 씀씀이가 커서 어려움을 겪었을 뿐이다. 그는 결국 파산해 집에서 쫓겨나고 빚을 갚기 위해 부인의 묏자리까지 팔아야 하는 처지가 됐다. 그는 일생을 통해 자화상을 꾸준히 그렸지만 그 자신의 자아를 충족시키고 탐구하기 위한 작업은 아니었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다만 렘브란트라는 인물 자체가 잘 팔리는 브랜드였기 때문에 그랬을 뿐이라는 것이다. (암스테르담 AP=연합뉴스) maroonj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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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 400주년 맞아 재조명되는 렘브란트 |
오는 15일 탄생 400주년을 맞는 렘브란트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네덜란드에서 집중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한해 동안 계속되는 "렘브란트 400" 행사들 중에서도 다양한 주제를 갖고 열리는 수많은 렘브란트 전시회는 렘브란트를 되돌아보기 위한 가장 큰 행사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네덜란드에 이미 소장된 49점의 렘브란트 작품 외에 전 세계에서 약 100점의 렘브란트 작품이 네덜란드의 여러 미술관에 대여됐다.
그러나 태어난지 400주년이 되는 지금에도 그의 작품 못지 않게 관심을 끄는 것은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가 하는 문제다.
유달리 많은 자화상을 남겨 놓고 그와 동시대 화가였던 베르메르 등과 비교해 파산기록이나 소송기록 등 관련 자료도 풍부하게 남겨져 있는 렘브란트지만 의외로 그는 베일 속에 가려진 인물로 남아있었다.
그 배경에는 이 위대한 화가의 실체를 미궁 속에 감추고 영원히 신비의 베일 속에 감춰두려는 일부의 낭만적 의도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탄생 400주년을 맞아 이뤄지고 있는 렘브란트 재조명 작업에 화가 렘브란트가 어떤 사람이었나 하는 문제가 빠질 수는 없다.
렘브란트 전문가인 역사가 개리 슈워츠는 그에 대해 "그다지 좋은 성격이 아니고 남과 마찰이 잦았던 사람"이라고 평했다.
슈워츠는 렘브란트가 소송을 통해 아들의 보모였던 정부 헤이르체 디르흐를 정신이상자로 몰아 가두었던 사실을 지적하며 최소한 이 사건에서 렘브란트는 매우 잔인했다고 지적했다. 슈워츠는 1984년 그가 발간한 "렘브란트 : 생애와 그림"을 저술할 때 토대가 된 500건 정도의 자료를 연구하며 렘브란트 인간성의 어두운 측면이 사가들에 의해 감춰져 왔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렘브란트가 가족이나 채권자, 후견인, 심지어는 그림의 모델들과 일으킨 다툼이 자신이 알고 있는 것만도 25건이나 된다고 밝혔다. 슈워츠는 지난달 발간한 그의 신간 "렘브란트 북"에서는 렘브란트에 대한 평가를 다소 누그러뜨려 그가 단지 "타협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으며 이런 성격이 문제를 일으켰으나 예술에는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렘브란트에 관한 세계 최고의 연구센터인 렘브란트연구프로젝트(Rembrandt Research Project)를 이끌고 있는 에른스트 반 데 웨터링은 "사람들이 렘브란트에 대한 기존 이미지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으로 그를 보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렘브란트가 그림에 대한 불 같은 정념으로 최고의 창조성을 이룩했던 불우한 화가라는 일반의 생각은 사실과 다르다고 말했다. 렘브란트는 다만 그림으로 성공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던 화가였다는 것이 그의 평가다. 렘브란트는 역사화나 성서의 일화를 주제로 한 대작을 그릴 때 수많은 연습 스케치를 해가며 빛의 효과와 얼굴 표정 등을 연구하고 이를 토대로 대작을 완성해가는 그런 스타일이었다는 설명이다. 렘브란트는 결코 가난과 싸워야 했던 화가는 아니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명성을 얻었고 주문이 끊이지 않았다. 다만 돈 관리에 실패하고 씀씀이가 커서 어려움을 겪었을 뿐이다. 그는 결국 파산해 집에서 쫓겨나고 빚을 갚기 위해 부인의 묏자리까지 팔아야 하는 처지가 됐다. 그는 일생을 통해 자화상을 꾸준히 그렸지만 그 자신의 자아를 충족시키고 탐구하기 위한 작업은 아니었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다만 렘브란트라는 인물 자체가 잘 팔리는 브랜드였기 때문에 그랬을 뿐이라는 것이다. (암스테르담 AP=연합뉴스) maroonje@yna.co.kr
슈워츠는 렘브란트가 소송을 통해 아들의 보모였던 정부 헤이르체 디르흐를 정신이상자로 몰아 가두었던 사실을 지적하며 최소한 이 사건에서 렘브란트는 매우 잔인했다고 지적했다. 슈워츠는 1984년 그가 발간한 "렘브란트 : 생애와 그림"을 저술할 때 토대가 된 500건 정도의 자료를 연구하며 렘브란트 인간성의 어두운 측면이 사가들에 의해 감춰져 왔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렘브란트가 가족이나 채권자, 후견인, 심지어는 그림의 모델들과 일으킨 다툼이 자신이 알고 있는 것만도 25건이나 된다고 밝혔다. 슈워츠는 지난달 발간한 그의 신간 "렘브란트 북"에서는 렘브란트에 대한 평가를 다소 누그러뜨려 그가 단지 "타협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으며 이런 성격이 문제를 일으켰으나 예술에는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렘브란트에 관한 세계 최고의 연구센터인 렘브란트연구프로젝트(Rembrandt Research Project)를 이끌고 있는 에른스트 반 데 웨터링은 "사람들이 렘브란트에 대한 기존 이미지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으로 그를 보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렘브란트가 그림에 대한 불 같은 정념으로 최고의 창조성을 이룩했던 불우한 화가라는 일반의 생각은 사실과 다르다고 말했다. 렘브란트는 다만 그림으로 성공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던 화가였다는 것이 그의 평가다. 렘브란트는 역사화나 성서의 일화를 주제로 한 대작을 그릴 때 수많은 연습 스케치를 해가며 빛의 효과와 얼굴 표정 등을 연구하고 이를 토대로 대작을 완성해가는 그런 스타일이었다는 설명이다. 렘브란트는 결코 가난과 싸워야 했던 화가는 아니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명성을 얻었고 주문이 끊이지 않았다. 다만 돈 관리에 실패하고 씀씀이가 커서 어려움을 겪었을 뿐이다. 그는 결국 파산해 집에서 쫓겨나고 빚을 갚기 위해 부인의 묏자리까지 팔아야 하는 처지가 됐다. 그는 일생을 통해 자화상을 꾸준히 그렸지만 그 자신의 자아를 충족시키고 탐구하기 위한 작업은 아니었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다만 렘브란트라는 인물 자체가 잘 팔리는 브랜드였기 때문에 그랬을 뿐이라는 것이다. (암스테르담 AP=연합뉴스) maroonj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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