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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도쿄경제대학 교수, 성공회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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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서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일어번역은 ‘살아있는 것’으로 바꿔 저항색 지워
번역은 때론 오해와 대립의 씨앗이 될진대 지배자의 언어에 갇힌 난 어쩌란 말인가
6월30일 독일에 왔다. 리이프치히와 뒤셀도르프에서는 대학에서 특별강의를 할 예정이다. 옛 동독에 있는 항구도시 로스토크에서는 시민을 대상으로 강의한다. 로스토크는 독일통일 직후 베트남인에 대한 대규모 습격이 벌어진 곳으로 알려져 있다. 사회주의국인 동독에는 제3세계에서 온 노동자, 기술자, 유학생이 상당수 거주하고 있었는데, 통일 전후의 사회적 혼란 와중에 대두한 네오나치 등 극우파가 외국인 배척 목소리를 높이며 폭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문제는 일반시민중에도 이런 움직임에 동조하는 자가 적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나치스의 인종차별사상과 싸운 사람들의 손으로 세워진 나라에서 사회주의사상을 통한 국제연대정신을 새겨넣었을 시민들이 마음 밑바닥에 감추고 있던 차별의식과 배외주의를 노출한 순간이었다. 베트남인 주택을 에워싸고 화염병을 던지는 사람들을 촬영한 당시의 뉴스 영상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로스토크에서 내가 얘기할 테마는 ‘일본의 외국인 문제’다. 재일조선인의 역사와 현실을 알기 쉽게 얘기할 작정인데, 급속히 우경화하는 일본사회에서 재일조선인 등 소수자가 일상적으로 느끼고 있는 위기감을 청중에게 전하고 싶다. 그런데 한국은 어떤가? 독일에서 일어난 일이 한국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안심해도 괜찮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또 한 곳, 쾰른에서는 다와다 요코와의 공개 대담이 예정돼 있다. 테마는 ‘디아스포라들의 언어표현’이다. 다와다는 아쿠다카와상을 받은 저명한 소설가인데, 생활 거점은 독일이고 일본어와 독일어 양쪽으로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다와다와 내가 대조적인 것은 일본인 여성과 재일조선인 남성이라는 점만은 아니다.
예전에 나는 <소년의 눈물>이라는 작품으로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받은 적이 있다. 이 상은 ‘뛰어난 일본어 표현’에 주어지는 상인데, 수상 통지를 받았을 때 내 마음에 차오른 것은 기쁨만은 아니었다. -조선을 식민지지배한 나라인 일본에서 태어난 나는 본래라면 자신의 모어였을 언어(조선어)를 사전에 박탈당하고 예전의 지배자 언어(일본어)를 모어로 해서 자랐다. 일본어 표현이 훌륭하다는 것은 뼛속까지 일본어가 침투해버렸다는 걸 의미한다. 나는 무엇을 생각하든 일본어로 생각하고, 어떤 표현을 하든 일본어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일본어라는 ‘언어의 감옥’의 수인이 아니고 무엇인가. 수인인 나는 어떻게든 더욱 넓은 장소에 나가, 일찌기 식민지지배나 민족분단 때문에 찢겨나간 겨레들에게 내 마음을 전하고, 전세계 사람들과 일본어를 매개로 삼지 않고 의사소통을 해보고 싶었다.
번역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사람들은 말한다. 분명히 번역 덕에 내 작품을 이 나라 사람들도 읽을 수 있게 된 것은 어찌됐든 기쁜 일이다. 그러나 번역이라는 작업에는 한계도 있고 위험성도 있다.
예컨대 윤동주의 <서시>는 일본에서도 널리 읽히고 있으나 그 일본어역에는 중대한 의문이 있다. 원문의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부분중 ‘모든 죽어가는 것’을 역자인 이부키 고는 ‘모든 살아 있는 것(生きとし生けるもの)’으로 번역했는데 이 부분에 대해 일본의 대표적인 조선문학연구자 오오무라 마스오는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윤동주는 ‘죽어가는 것’을 모두 사랑했다는 것이고, 무한정적으로 생명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 건 아니다. 일본군국주의 때문에 많은 조선인이 죽어가고, 조선인의 언어도, 이름도, 민족문화의 모든것이 죽어가는 시대였다. 윤동주에게는 그런 ‘죽어가는 것’에 대한 사랑과 함께 죽음으로 몰아가는 것에 대한 ‘격렬한 증오’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부키는 “모든 죽어가는 것(すべての死にゆくもの)이란 살아있는 것이므로, ‘죽음으로 몰아가는 것’은 거기에 포함되지 않는다 는 식으로 얘기할 순 없다. ‘모든 죽어가는 것’과 ‘모든 살아있는 것’은 동의어다”라고 반론하고 “이 실존응시의 사랑의 표백(표출)은 군국주의 일본인에 대한 증오 따위와는 상관없다”고 주장했다.
내 생각에 여기에는 단지 번역어의 적절성 수준을 넘는 심각한 문제가 내포돼 있다. 오오무라는 윤동주의 ‘저항’정신을 강조하고, 이부키는 보편적인 ‘실존응시의 사랑’을 보려 한다. 이것은 윤동주의 생애나 작품에 관한 해석의 어긋남(차이)에 그치지 않고 식민지지배라는 현실 그 자체에 대한 감성의 어긋남이 존재한다는 걸 시사하고 있다. 원문을 그대로 읽으면 굳이 ‘살아있는 모든 것’ 따위로 거드럼피는 번역어를 고를 이유를 찾기 어렵지만 일본에서는 이부키 고 번역이 정역본으로 보급돼 있다. 일본의 많은 독자들은 (결코 모든 독자는 아니지만) 일본이 식민지지배를 통해 조선민족에게 해를 가한 사실을 자세히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꺼림칙한 과거를 되돌아보고 싶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윤동주의 시도 가능한 한 일본을 향한 고발로서가 아니라 매우 일반적인 ‘실존적 사랑의 표백(표출)’으로 읽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부키 자신도 예외가 아니다. 번역이라는 행위가 타자간의 상호이해를 증진하기는커녕 오히려 오해와 대립을 심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지는 실례가 여기에 있다.
더우기 일본어를 모어로 삼고 살아가는 재일조선인은 자신들의 민족적 아이덴티티를 형성할 때조차 일본어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나 자신 다른 재일조선인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윤동주를 이부키 역으로 읽었다. 여기에 재일조선인이라는 존재가 안고 있는 심각한 어려움이 있다. 모어를 바꿀 수 있다면 간단하지만 그것은 태어난 뒤의 인생 그 자체를 몽땅 바꾸는 것과 같다. 그게 가능하겠는가? 모어를 교환할 수가 없다면 모든 인간은 모어라는 감옥의 수인이다. 일본어와 독일어 2개 언어를 완전히 자유롭게 구사한다는 다와다 요코와, 일본어라는 감옥의 수인인 나는 매우 대조적이다. 그는 정말 모어의 감옥에서 빠져나가는 데 성공했을까. 어떤 대화가 될지, 스릴도 있고 즐거움도 있다. 번역/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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