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7.20 18:23
수정 : 2006.07.21 16:21
이달 초 활동 시작한 크메르루주 국제전범재판소 30년 전 최악의 대량학살 진상은 뭘까?
크메르루주에만 ‘비극’ 덮어씌우기 미군 비밀폭격·베트남 침공은 왜 문제삼지 않나
2003년 3월 유엔과 캄보디아 정부의 합의 이후 3년 반을 끌어오던 크메르루주 국제전범재판소가 지난 7월4일 문을 열고 활동을 시작했다. 3년 동안 계속될 이 재판은 유엔의 이름으로 5천6백30만달러가 쓰일 값비싼 국제행사다.
국제전범재판에 쏟아지는 비판의 핵심은 과도한 예산과 보잘 것 없는 결과다. 르완다 국제전범재판은 1천3백만달러를 탕진했고 1994년 27만6천달러로 시작했던 유고 전범재판은 이후 10억달러 이상을 날려버렸지만 얻은 것은 변변치 않은 대신 나토의 폭격으로 인한 민간인 학살의 경우처럼 진실을 밝히기보다 오히려 미봉했다.
75년에서 78년까지의 44개월 동안 민주캄푸치아 통치 기간에 자행된 학살의 책임을 묻는 크메르루주 전범재판 또한 큰 기대를 걸기는 쉽지 않다. 무엇보다 르완다, 유고와 달리 크메르루주 전범재판은 무려 30년 전에 벌어진 사건에 매달려야 할 판이다. 핵심인물인 폴포트는 이미 99년에 사망했다. 피고로 기소될 주요인물인 누온체와 이엥사리, 키우삼판 등은 이미 70대의 노인들이고 따목은 사경을 헤매고 있다. 현재의 수상인 훈센 역시 크메르루주의 일원이었다는 사실 또한 재판을 혼란스럽게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재판에 의의를 부여한다면 30년 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던 인류역사상 최악의 대량학살 가운데 하나의 진상을 조명하게 된다는 것이다. 일반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1975~78년의 민주캄푸치아 통치기간 중 발생한 캄보디아인들의 대규모 사망은 크메르루주로 알려진 민주캄푸치아 공산정권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성격은 아니다.
크메르루주 대량학살설은 75년 함락 직전까지 프놈펜에 머물렀던 프랑스 선교사인 프랑소와 퐁세드의 수기인 <이어제로>로 발화되었고 캄보디아를 침공한 베트남에 의해 확산되었으며 미국 예일대학의 벤 키어넌의 논문과 저작에 이르러 150만 학살설로 완성된 후 영화 <킬링필드>에 의해 전 세계인의 머리에 각인되었다. 그러나 노엄 촘스키와 같은 미국의 학자는 초기부터 반론을 제기했으며 벤 키어넌보다 앞서 미 중앙정보국(CIA)의 자료를 토대로 민주캄푸치아 시기를 연구했던 핀란드의 마이클 비커리가 제시한 사망자 수는 70만이었다. 냉전시대의 서방이 택한 것은 70만이 아닌 150만이었고 킬링필드는 이후 200만을 거쳐 300만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 숫자가 터무니없다는 것은 60년대 이후 최초로 실시되었던 99년의 인구센서스 결과가 말해준다. 150~300만 설은 정상적인 인구증가율을 뒷받침할 수 없으며 더욱이 내전을 고려한다면 완전한 허구에 불과하다.
당시 인구의 10%에 가까운 60~70만을 헤아리는 캄보디아인들이 목숨을 잃어야 했던 것은 여전히 사실이다. 그러나 이 비극을 크메르루주에게 덮어씌우는 것은 역사적 진실의 매장이라는 또 다른 비극을 낳을 뿐이다. 75년 공산화 당시 캄보디아의 식량 자급률은 30%를 밑돌았다. 대규모의 아사가 예상되는 가운데 40만t의 쌀이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국제원조는 중국의 1만6천t이 고작이었다. 대규모 아사는 피할 수 없는 참극이었다. 그 직접적 원인을 제공한 것이 68년부터 시작되었던 미군의 캄보디아 비밀폭격이었다. 4만3천회의 출격과 2백만t의 폭탄 투하로 60만에서 80만으로 추정되는 (주로 농민인)캄보디아인들이 목숨을 잃었고 남부와 동부의 곡창지대는 융단폭격으로 풀 한포기 자라지 못하는 불모지가 되어 75년 이후 대규모 아사로 이어졌다.
80년대 크메르루주의 킬링필드 돌풍을 세계적으로 불러일으켰던 이면에는 79년 캄보디아를 침공한 베트남의 역할이 지대했다. 침공 직후 베트남은 괴뢰정권을 수립함과 동시에 국제적 비난을 완화하기 위해 툴슬렝 박물관을 세우고 캄보디아 전역에 킬링필드를 ‘개발’한 후 서방의 기자들을 불러들였다. 냉전시대였던 80년대에 베트남의 킬링필드 선전은 반공주의의 호재였고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이후 캄보디아는 단 한 번도 그 족쇄를 벗은 적이 없다. 전범재판이 미국이 비밀폭격을 시작했던 68년에서 베트남이 캄보디아에서 철군했던 91년까지를 대상으로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온전히 밝힐 수 없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세계사의 한 구석에서 불명예스럽게 매장되어 있던 한 시대가 국제전범재판이라는 이름 아래 심판대에 서게 되었다. 르완다와 유고 그리고 또 다른 국제전범재판과 다를 것 없이 껍질만 호화로운 재판으로 종결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크메르루주를 심판대에 올린 이 재판은 인종도살자인 르완다의 후투족 지도부와 유고의 밀로세비치를 피고인석에 세운 국제전범재판과는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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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현/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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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재판의 주인공은 본질적으로 크메르루주가 아닌 70년대의 인도차이나다. 이 재판이 70년대 인도차이나의 캄보디아에서 덧없이 스러져간 수많은 생명들에 대한 책임과 정의를 묻고자 한다면 그 대상은 크메르루주만이 아니다. 68년에서 71년까지 미군의 맹폭으로 60~80만의 캄보디아인이 목숨을 잃었고 공산화 이후 수십만에 달하는 캄보디아인들이 굶어죽어야 했다. 살인자는 크메르루주가 아니라 미국이었다. 국제전범재판의 심판대에 먼저 올라야 할 인물은 크메르루주의 지도부가 아니라 아직도 살아 숨 쉬고 있는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일 것이다. 프놈펜의 국제전범재판소가 정의를 원한다면 리처드 닉슨 전 미 대통령의 뼈라도 재판정의 피고석에 세워야 할 것이다. 캄보디아 침공의 책임자였던 베트남의 보응우엔지압 역시 끈질기게 살아 있다. 그 또한 증인으로 기꺼이 재판정에 서야 할 것이다.
유재현/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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