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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7.27 19:27 수정 : 2006.07.28 15:34

서경식/도쿄경제대 교수, 성공회대 연구교수

빚만 늘어가고 가난할지언정 속임수가 판치고 사람 밀쳐내는 사회 거부하자던
옛동독인의 초심은 어디에 있는가 라이프치히대학 여교수의 얼굴에 언뜻 비쳤다

독일에서 만난 사람

7월11일 라이프치히 대학 특별강연을 위해 이 전통있는 도시를 찾았다. 실은 내가 라이프치히를 방문한 것은 1991년에 이어 두번째다. 그 무렵은 동서독이 통일한 직후였다. 대다수 건물 벽은 검게 그을려 있었고 창문은 깨어진 채 방치돼 있었다. 크라나하나 벡크린의 명작을 소장하고 있는 미술관에는 동독시대의 흔적으로, 불가리아인 공산주의자 디미트로프의 이름을 쓴 간판이 그대로 걸려 있었다. 바흐가 악장으로 있던 성 토마스교회 주변은 소란스런 재개발 공사현장이 돼 있었다.

15년 지난 뒤에 와 보니 거리는 몰라볼만큼 깔끔하게 변해 있었다. 이름을 바꾼 미술관은 유리를 많이 쓴 현대적인 건축물로 재건축돼 시가지 중심부에 솟아 있었다. 성 토마스 교회 주변은 번화한 상업지구로 변해 커다란 쇼핑몰이 영업을 하고 있었다. 광장에서 문을 연 야외카페에선 한가한 모습의 시민들이 대화에 열중하고 있었다. 위도가 높은 탓에 밤 9시가 지나도 어둡지 않다. 나도 강의를 끝낸 뒤 야외 맥주집에서 라이프치히 대학 교수, 연구자들과 함께 그 지방 맥주를 즐겼다. 맥주도 두잔 째로 넘어갈 무렵 S교수가 주위를 살피면서 불쑥 말했다. “여기 있는 사람들 대다수는 이 지역 사람들이 아닙니다. ‘서’에서 온 돈가진 사람들이지요. ‘동’ 인간들은 원래 밤은 집에서 보내는 게 관습입니다. 게다가 가격도 비싸서.”

S교수는 일본학과 주임이다. 이곳 라이프치히 출신인 이 여성은 매우 정확한 일본어를 구사할 줄 아는, 침착하고 총명한 인물이다. 실은 그와 같은 옛동독 출신자가 옛동독 대학 교수를 하고 있는 건 예외적인 일이다. 동서독일 통일 뒤 서쪽 기업이 대거 동쪽으로 진출해 순식간에 시장을 석권했는데, 그 비슷한 일은 대학에서도 일어났다. 통일 직후 4년간 4만명 가까운 동쪽 대학 관계자들중 약 반수인 2만명이 국가보안경찰(슈타지·비밀경찰)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등의 이유로 해직당했다. 그 빈 자리에 서쪽에서 자리를 얻지 못했던 연구자들이 대거 유입됐던 것이다.

몸가짐이 우아한 S교수였는데, 젊은 시절에는 유망한 육상경기 선수였다고 한다. 종목을 물어보니 “투창입니다. 고자이 요시시게와 같죠”라고 대답하고는 살풋 미소를 지었다. 생각지도 않은 장소에서 생각지도 않은 이름을 듣고 나도 웃고 말았다. 일본의 저명한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인 고자이는 학창시절 분명히 투창계의 명선수였다. 하지만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아니 지금 일본에는 고자이 요시시게라는 이름만이라도 아는 사람조차 많지 않을 것이다. 그 이름을 댄 S교수한테서는 아무래도 동독이라는 사회주의사회에서 자기형성기를 거친 사람다운 교양을 느낄 수 있었다.

스포츠에 몰두한 이유를 묻자 “어떻게든 외국에 가보고 싶어서”라고 대답했다. 동독의 젊은이들에게 국외로 나가는 꿈을 실현하는 길은 스포츠나 예술 분야에서 국가대표가 되는 것이었다. 애석하게도 국가대표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학문의 길로 방향을 틀었다. 모스크바에 유학하고 옛 동베를린의 훔볼트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한 뒤 일본연구로 전공을 바꿨다. 늦게 시작한 일본어가 그토록 능숙했던 건 스포츠를 맹렬히 훈련하듯 어학 학습에 몰두했기 때문일까.

동석했던 그의 동료가 주사놓는 시늉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말이죠, S씨는 스포츠 도정에서 좌절한 게 다행이었어요. 그러지 않았다면 도핑검사에 걸려 지금쯤 어떻게 돼 있을지…”


그 말을 듣고 S교수의 미소는 쓴웃음으로 변했다. 바깥세상에서 온 사람에겐 가벼운 웃음거리일지라도 당사자인 그로서는 정리되지 않는 괴로운 기억일 것이다. 동독 스포츠계가 국위선양을 위해 대대적인 도핑을 자행하고 있었던 건 지금은 역사적 사실이 됐다고 할 수 있다. 진상규명과 책임추궁 움직임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했을 때 동베를린에서 서쪽으로 나와 서독 정부가 지급한 100마르크의 ‘환영금’으로 바나나를 사서 기뻐하는 사람들 모습을 텔레비전에서 봤습니다. 동쪽 사람들은 당시 그렇게도 바나나가 먹고 싶었던 건가요?”

내가 그렇게 묻자 S교수는 본의아니게 표정이 굳어졌다. “그때 그런 영상들을 매스미디어가 대대적으로 흘러보냈죠. 하지만 그것은 너무 단순한 시각입니다. 사람들은 자유를 갈망했던 것이지 바나나를 먹고 싶었던 건 아닙니다.” 다음 날 예정에 대해 S교수가 묻기에 시내 니콜라이 교회와 현대사자료관을 구경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전자는 베를린 장벽 붕괴의 한 원인이 된 동독 ‘자유화운동의 성지’로 유명하고, 후자는 독일 통일 뒤 연방정부가 일반시민을 대상으로 설립한 현대사 전시관이다. S교수는 복잡한 표정을 풀지 못한 채 “그곳은 ‘본 출장소’같은 곳이어서요”라며 내게 주의하라고 했다. “즉 ‘서’쪽 시각만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거기에 ‘동’쪽 사람들 시각은 반영돼 있지 않다, 그런 의미입니까?”라고 물었더니 말없이 고개를 조용히 끄덕였다.

옛동독의 자유화운동을 주도한 시민과 지식인 조직은 ‘신포럼’이라 불렸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직후 이 조직은 동독 시민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여러분의 두려워하지 않는 자발적 의견표명은 평화혁명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중략)아직 당분간 우리는 가난하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속임수가 판치고 사람을 밀쳐내고 좋은 자리를 먼저 차지하는 그런 사회를 바라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평화혁명의 영웅입니다. 어쨌든 서쪽으로의 여행과 빚만 늘어갈 뿐인 소비 주사에 만족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자본주의적 번영이나 독일민족의 성급한 국가통일을 바라고 있었던 건 아니다. 상업주의 폭풍을 견디고 자립하는, 실로 자유로운 시민들의 새로운 사회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16년간에 걸쳐 ‘소비 주사’를 맞은 뒤 지금은 그 초심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찾아보기도 어려워졌다. 그 초심의 흔적을 나는 S교수의 복잡한 표정의 그늘에서 읽어내긴 했지만.

서경식/도쿄경제대 교수, 성공회대 연구교수, 번역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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