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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8.17 15:36 수정 : 2006.08.18 14:20

중세 마을을 그대로 간직한 우르비노는 행인에게 침묵으로 말을 걸고 있었다
그것은 타인과 친해지는 내밀한 상태이며 귀를 기울이는 일이며
자신의 몸을 낮추는 일이며 그리하여 배우는 일이다

지난달 이탈리아 우르비노 대학을 다녀왔다. 뒤로는 아페니노 산맥이, 앞으로는 아드리아 해안이 멀리 보이는 중세 마을에 있는 대학이었다. 우리가 이번에 참석한 행사는 세계대학연극학회(AITU)가 주최한 제6회 세계 총회였다. 2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데, 이번에는 우르비노 대학 개교 500주년 기념으로 열렸다. 여러 나라에서 온 연극학과 교수들이 약 150명쯤, 학생들은 약 100명쯤 되었다. 교수와 학생들은 대학 기숙사에서 함께 지냈고, 대학 식당에서 하루 세 번 같이 식사를 했다. 매일 오전, 오후 주제별 세미나, 워크숍이 영어, 불어, 스페인어로 열렸다. 나는 둘째 날 오전, ‘연극과 기억’이라는 주제를 발표했다. 연극을 창조하는 과정에서 기억의 획득, 보존, 변형, 표현이라는 네 단계가 지니는 미학적 가치에 관한 것이었다. 저녁 식사 후에는 중세 성이었던 대학에 들어가 연극을 보았다. 중세에 지은 성 안에는 대학과 작은 마을이 그대로 공존하고 있었다. 공연이 끝난 후에는 성 안 광장의 카페에 앉아 참가자들과 공연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총회 둘째 날, 노벨문학상을 받은 다리오 포가 우리를 축하하기 위해서 우르비노에 왔다. 집행위원회는 다리오 포와 아우구스토 보알을 특별 초청했다. 연극으로 권력과 폭력에 저항해 자신의 삶이 멍울로 변했지만, 그는 큰 사람이었고, 존경받는 영웅이었다. 무대 위에서 한 그의 강연은 한 편의 즉흥극이었다. 여든 살에 접어든 그는 여전히 능숙했고, 미국과 이스라엘의 레바논 공격을 서슴없이 비판했다. 끝 무렵, 그는 우리를 향해 말했다. 코미디는 슬픔의 정조로 하는 판타스틱이라고. 다음날 그와 함께 찍은 사진이 지역 신문에 게재되기도 했다. 함께 오기로 한 아우구스트 보알은 몸이 불편한 이유로 참석하지 못했다. 다리오 포를 보면서, 이탈리아가 1944년부터 1954년까지 경험한 나치-파시스트 지배가 떠올랐다. 실제로 우르비노 마을의 회관에도 광포했던 나치-파시스트에 저항한 우르비노 사람들의 애국심을 그리는 글이 벽면에 새겨져 있었다.

우르비노는 매혹의 장소였다. 그곳은 삶의 시간을 강렬하게 만드는 터였다. 중세 마을의 골목이 주는 신비함, 그것은 물질적 세계를 넘어서는 황홀감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을 오래된 골목과 집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라틴어 ‘신비’의 어원은 침묵이다. 그곳에 비밀이 있다. 우르비노와 같은 낯선 곳에 처음 다다르면, 길은 이렇게 묻는 것 같다. “당신은 그동안 어디 있었어요?”라고. 그 질문의 답은 첫 발을 내딛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면 시간이 멎어버린 길은 더 이상 질문하지 않고 침묵한다. 그것이 우르비노의 오래된 길과의 첫 만남이었고, 시작이었다. 이제부터 낯선 것들이 친숙한 것이 되고, 멀리 있는 것이 가까이 다가온다. 침묵하고 있던 집과 골목 그리고 사람들의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어떤 때는 그것들이 쉴새없이 몰려든다. 전혀 본 적이 없는 사람들, 전혀 걸은 적이 없는 길들이 섬세하게 다가온다. 같이 간 한 학생이 우르비노, 그 중세의 길에서 몽상에 잠겨 헤맨 적이 있었다. 그는 ‘현대’에 사는 자신이 중세라는 ‘시대착오적’ 환각에 빠졌었다고 했다. 자신이 비사실적으로 여겨졌고, 길을 잃었다는 망연자실 속에서 감각은 놀랍게도 더 열리고, 중세 우르비노의 마을 사람이 지금 다시 등장한 것처럼, 현재의 자신이 소멸되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이런 곳에서 길을 잃으면, 자신이 녹초처럼 녹아내리고, 아주 시원적인 존재가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길은 지배력을 행사해서 길 잃은 이의 눈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가슴으로 느끼게 한다. 길을 잃고 걸어가는 모습에 극단적인 정숙함이 있다. 길을 잃고 헤매는 그에게 우르비노의 오래된 길들이 말을 걸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 말을 하기 위하여 침묵으로 손을 내밀고 있었다. 침묵 속에서 길 걷기, 그것은 비밀 속을 걸어가는 것. 길을 잃으면 침묵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침묵, 그것은 낯선 길이라는 타인과 친해지는 내밀한 상태이며, 귀 기울이는 일이며, 자신의 몸을 낮추는 일이며, 그 길에 발을 들여놓는 일이다. 그리하여 배우는 일이다.

로마로 돌아가는 날, 버스는 우르비노 산 아래로 내려간 다음, 아페니노 산맥을 가로질러 가기 시작했다.

안치운/호서대 교수·연극학과, 연극평론가
험준하기보다는 장엄한, 긴 산맥이다. 버스가 카트리아(1702미터) 산을 넘어갈 때는 그냥 내리고 싶었다. 장비가 없어도 산을 오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목동들이 살고 있는 집들도 드문드문 산 속에 있었다. 로마에서 출발하자면 반드시 이 산을 넘어야 페자로와 우르비노가 있는 마르케 주로 올 수 있다. 아페니노 산맥이 끝나는 곳에 페자로라는 도시가 있고, 위로는 저 멀리 베네치아 만을 거쳐 베네치아가, 건너편으로는 그리이스와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있는 발칸반도로 이어진다. 모든 강물이 바다로 휩쓸려 들어가는 것처럼, 산도 결국 바다가 된다. 그곳에 침묵이 있다. 귀국해서 들입다 잠을 자고 있다. 그것 역시 영원한 침묵인 잠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처음으로, 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욕망이 일었다. 기억을 유지하고 싶어하는 노력일 터이다. 제 몸을 숨기며, 웅크린 채. 기억을 반추하면서.

안치운/호서대 교수·연극학과, 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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