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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중반 무렵 미군 아전병원이 있던 아사카 시내에서 베트남전쟁 반대시위를 벌이고 있는 오이즈미 시민들. 가운데 필자, 왼쪽은 시미즈 도모히사 교수. 이다 다카오가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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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년 4월 킹 목사 암살사건이 나를 충동질했다. 아사카 미군기지 앞에서 ‘베트남 침략전쟁 중단’ 1인 시위를 하고 반전운동 호소 전단도 뿌렸다…한국의 강요된 참전엔 무관심했지만 파병을 거부하고 밀항온 한국군 김동희 사건은 상징적이었다
와다 하루키 회고록-내가 만난 한반도/⑨ 베트남전쟁 반대운동 나는 결혼한 뒤 도쿄대 정문 앞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아버지는 1965년 3월 시미즈 고등학교를 정년퇴직하고 도쿄 네리마구 오이즈미가쿠엔쵸에 집을 지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외동아들인 나와 함께 살 작정이었고 우리도 그러기를 바랬다. 그해 6월 우리는 아버지 집으로 이사했다. 이삿짐 트럭은 두 곳의 자위대 주둔지 앞을 지나면서 우리를 놀라게 만들었다. 그 앞에 미군 골프장이 있었다. 아사카 미군기지의 일부였다. 거기는 사이타마현과 도쿄도 경계이고, 그곳을 넘어 오이즈미가쿠엔쵸로 갔다. 그해 연말 골프장 북쪽 미군기지에 베드수 1천개의 야전병원이 문을 열었다. 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66년 봄 딸이 태어났다. 내가 그 야전병원을 알게 된 것은 66년 여름 <아사히 그라프>에서 사진을 봤기 때문이다. 나는 아사카로 달려가 헬리콥터에서 내려지는 부상병들 사진을 찍었다. 그 사진은 직장의 게시판에 붙었다. 나는 그 이상은 아무것도 몰랐다. 그 무렵 러시아사연구회는 러시아혁명 50주년 기념논문집을 낼 계획을 세웠다. 그 때문에 나는 논문 쓰는 일에 집중했다. 내가 맡은 부분은 2월혁명이었다. 세계대전 와중에 총력전체제에 불만을 품은 민중이 들고일어나 제정이 붕괴했다. 나는 이 혁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염전기분에 젖은 병사들의 반란에 주목했다. 67년에 들어가자 요코다 미 공군기지에서 베트남 부상병을 아사카 병원으로 실어나르는 헬리콥터가 우리 집 위를 날아다녔다. 나는 거의 1년간 그 소리를 들으며 50년 전의 병사들 반란에 대한 원고를 써내려갔던 것이다. 이미 오다 마코토씨와 쓰루미 슌스케씨 등은 ‘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베헤이렌)을 만들어 도쿄 도심에서 매달 정례적으로 데모를 벌이고 있었다.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한 채 그토록 오랜 시간을 보낸다는 게 고통스러워졌다. 68년 4월5일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암살당했다. 그것이 나를 충동질했다. 흑인청년들이 백인청년들보다 더 많이 징병당해 베트남 전장에서 더 많이 죽어갔다. 이래도 되는 건가. 나는 흑인 병사들에게 호소하고 싶었다. 다음 일요일 나는 종이에 슬로건(구호)을 적어 아사카 기지 앞에 1인시위를 벌였다. “Stop the War of Aggression(침략전쟁 중단하라)”, “Who Killed Your M.L.King?(누가 킹 목사를 죽였나)”, “Young Afro-American, Go Home. Your Battle is not Here(젊은 흑인병사들이여,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들이 싸울 전장은 여기가 아니다)” 그렇게 서 있자니 사이타마 베헤이렌의 아사카 기지 반대 첫 데모대가 그곳에 왔다. 나는 그들을 뒤따라 가면서 도쿄쪽 시민들도 들고 일어나야 할 때가 왔다는 결론을 내렸다.나는 처를 설득해서 처와 나 두 사람 이름으로, 베트남전쟁 반대행동을 시작하자고 호소하는 삐라를 작성해서 인쇄했다. “오이즈미가쿠엔쵸 북쪽 하늘을 바쁘게 오가는 헬리콥터가 무엇을 운반하고 있는지 여러분은 이미 알고 있다.” “미국의 더러운 전쟁 기지가 이웃 마을에 있고, 베트남 전장에서 더러운 전쟁의 전사들을 후송하는 데 우리 마을 하늘을 이용하고 있는 걸 여러분은 좌시할 수 있는가. …오늘날 미국은 남베트남에 약 50만 대군을 보내 온갖 잔학한 무기를 사용하고 있으며, 제2차대전중 연합군기가 나치스 독일에 투하한 것보다 더 많은 폭탄을 베트남 전역에 뿌리고 있다.” “우리 부부는 최근 1년간 견딜 수 없는 고통속에 헬리콥터 폭음을 들어왔다. 우리에겐 늙은 양친과 2살짜리 딸이 있다. 다행히 건강한 우리 딸이 할아버지나 할머니와 놀고 있는 머리 위로, 베트남 아이들의 팔을 망가뜨리고 딸들의 얼굴을 태우고 있는 더러운 전쟁의 전사들이 실려가는 것을 보고 있는 건 고통이다.” 내가 이 삐라를 오이즈미가쿠엔쵸 역 앞에서 뿌리기 시작한 것은 5월6일이었는데,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얘기를 걸어왔다. 회사에 근무하는 젊은 여성과 학생, 가까운 단지의 주부, 그리고 공산당 구의회 의원 등이었다. 곧 내 얘기가 공산당 신문 <아카하타(적기)>에 실렸다. 나는 네리마구 내에 사는 지인들에게 삐라를 보냈다. 가장 기대하고 있었던 것은 예전에 함께 역사학연구회 위원을 지낸 미국사 전문가 시미즈 도모히사 일본여자대 교수였다. 그는 내 요청을 받아주었으며, 이후 20년간 나의 시민운동에 가장 가까운 동지가 됐다. 또 나는 시민운동에는 기독교 목사의 참여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때마침 도쿄대 서양사연구실 대학원생한테서 베트남 어린이들에게 의약품 보내기 운동 삐라를 받았다. 이 운동 사무국은 오이즈미 교회라고 씌어져 있었다. 열광한 나는 서둘러 일본기독교단 오이즈미 교회를 찾아갔다. 요코다 이사오 목사도 부인인 사치코씨도 나와 함께 운동하기로 굳게 약속해 주었다. 이로써 운동의 모양새가 갖춰졌다. 이윽고 1968년 7월7일 ‘베트남전쟁에 반대하고 아사카기지 철수를 요구하는 오이즈미시민 모임’이 오이즈미 교회에서 열렸다. 참가자는 48명. 오이즈미 주민 외에 시미즈씨가 다니는 여자대, 내가 강의하던 릿쿄대 학생들도 왔다. 공산당 사람들도 있었고 아나키스트 문필가도 있었다. 이후 1개월간 2회의 기지 견학을 하고, 8·15기념 삐라도 발행했으며 제2차 집회도 열었다. 우리는 미국 병사들에게 뿌릴 영문 삐라도 만들었다. 시미즈씨의 작품이었다. 그것을 9월1일 제3회 기지견학 때 병사들에게 울타리 너머로 전달했다. 흑인병사가 받으러 왔기에 나는 흑인 노래 ‘Oh, Freedom(오, 자유)’를 불렀고 시미즈씨한테서 칭찬을 들었다. 68년 후반은 아사카 야전병원을 철거하라는 서명운동을 벌여 매달 한번씩 데모를 했다. 그때는 도쿄대가 학생반란으로 진통을 겪고 있었고 내 에너지도 대부분 그쪽으로 향해 있었다. 제국주의대학 해체를 부르짖은 학생들은 야스다 강당을 점거하고 옥쇄하는 길을 택했고, 대학 당국은 기동대를 동원해 학생들을 분쇄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빠졌다. 그런 시련을 거쳐 69년 6월 우리는 하나의 비약기회를 맞았다. 그것은 아사카 반전방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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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다 하루키/도쿄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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