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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8.24 16:39 수정 : 2006.08.25 14:43

대물림으로 전해 온 베틀에 앉은 일흔두살 백순기 할머니. 여름옷 짓는 천 ‘춘포’를 짜는 백순기 할머니 집은 며느리들이 대를 이어가며 그의 며느리에 이르기까지 5대째 이 일을 해왔다.

모시 한올 비단 한올 날창날창 최고 여름옷 ‘춘포’
5대째 베틀잡이 딱 한 집에서 겨우 명맥
할아버지 ‘속사포 수다’ 2시간 듣고서야 구경
시어머니 대이은 할머니 반세기 솜씨 며느리에
진짜 장인 몰라보고 서양 명품만 좇았구나


이지누의 인물로 세상읽기/청양 운곡에서 춘포 짜는 백순기 할머니네

경기민요 베틀가에 갖은 베의 종류가 나오는데 주로 북한 지역의 것들이다. 각각의 노래에 따라 서로 다른 베의 종류가 나오지만 주로 평안도의 양덕과 맹산의 중세포 혹은 중서포, 함경도 길주와 명천의 세북포, 평안도 초산이나 벽동에서 짜던 칠승포와 더불어 희천이나 강계에서 짜던 육승포, 영원과 덕천의 오승포와 함경도 회령과 종성의 산북포가 그것이다. 그 외에는 조포와 경북 안동지방의 안동포, 당모시를 일컫는 생당포와 더불어 춘포(春布)라는 것이 나온다.

‘베틀가’에 나오는, 이름만 알던 베

어디 그뿐인가. 비단타령에는 100여 가지가 넘는 우리네 베의 종류가 나오는데 그곳에도 어김없이 춘포가 끼어 있으며 심청전이나 흥부전 그리고 춘향전과 같은 판소리에도 춘포가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만하더라도 나는 그것이 어떤 옷감인지 잘 몰랐다. 책에서 그 이름만 보았을 뿐 옷감을 본 적도, 그것으로 옷을 지어 입은 사람조차도 보지 못했다. 그러니 당연히 궁금할 수밖에, 마음이 동해 아직 춘포를 짜는 분이 계신지 수소문을 해 충북 청양으로 찾아 간 것이 7년 전이다. 다행히 운곡면의 한 집에서 명맥을 잇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춘포를 짜는 이는 일흔 둘이었던 백순기라는 분이었으며 그니의 동갑내기 남편은 이상준 씨였다. 그이네 집안 며느리들이 대를 이어가며 4대째 춘포짜는 일을 해 왔다고 하니 백순기 할머니가 4대째 베틀을 잡은 셈이다. 읍에서 20분 남짓, 아침 댓바람에 찾아 들었지만 싫은 내색 하지 않은 그들은 자리에 앉자마자 “춘포가 뭐래요. 있으면 구경이나 한 번 했으면 좋겠네”라는 나의 말에 백순기 씨가 “춘포가 여름 옷 짓는 천이지, 아는 사람 벨로 없을껴, 요 지방에서만 쬐끔 했다니께 아는 사람들이 있기나 하것어. 저 건넛방에 짜 놓은 게 있는데 봐 봐유”라고 했다. 그제야 나는 춘포를 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할머니가 말을 마치고 일어서려고 하자 곁에 앉았던 할아버지가 거들기 시작했다.


“요게, 춘포라는게, 일정 때, 그라니께 내가 국민학교 대니고 졸업하고 헐띡에, 그때는 요 운곡면 일대에는 안 헌 집 없이 춘포로다 다 했어. 그러니께 먹고살게 있시야지, 누에꼬치 따 갖고 그놈 실 뽑아 갖고 춘포 했는디, 누에꼬치는 알지 뽕잎 먹는 누에꼬치 말이여, 아, 그란데 일본 놈들이 죽어라 춘포를 못 짜게 허는기여. 집집마다 누에를 몇 장이나 치는지 그놈들이 다 알아도 그거를 전부 다 갖다 바칠 수는 없는 노릇 아녀, 그래 춘포 길쌈 할라고 한 장, 두 장 빼 돌린다 말여, 그라고 수매 헐 띡에 쪼끔 갖고 가믄, 누에 어쨌느냐고 닥달을 헌단 말이여, 그라믄 누에 농사짓다가 실패 봤다고 혀도 그놈들은 믿지를 않어, 독한 놈들이여 그놈들이…”

의외의 복병이었다. 더구나 말이 빠르기를 충청도 사람이라고 짐작할 수 없을 만치 속사포였으니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뿐인가. 내가 할머니에게 물으면 대답을 가로채서는 질문과는 영판 딴 곳으로 끌고 가서는 던져 놓기 일쑤였다. 생각해보라. 춘포짜는 집의 안방에 들어가서 한 번도 보지 못한 춘포를 보는데 2시간이나 걸렸다면 믿겠는가. 나는 그만 할아버지의 수선스러운 수다에 휘말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연신 웃음을 머금은 채 기관총같이 쏘아대는 할아버지의 입담과 넉살에 유쾌하기 짝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뭔 말이 그래 빠르대유, 알아들을 수가 없어요.” 라고 하자 “하하하, 그려, 내가 성질이 급해갖고 그런겨” “아까 밭에서 뭐 하시던 거 그거 손 안 보셔도 되나요. 요새 한창 바쁠 때 잖아요”하며 방에서 밀어내려 했으나 “하이고, 바쁜 거 없어, 바쁘면 또 어뗘, 충청도는 본래 그런기여, 괜찮으니께, 신경 쓰질 말어, 허던거나 계속 혀” 하시는 것이 아닌가. 그때를 놓치지 말아야했다. 그러나 할머니와 몇 마디 주고받느라 잠시 머뭇거리고 만 것이 잘못이었다. 할아버지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하이고 바쁜 거 없어, 본래 그랴”

대물림으로 춘포를 짜는 백순기 할머니(오른쪽)와 유쾌한 수다쟁이 이상준 할아버지 부부.
“그라믄 내가 계속허까, 이놈이 녹음이 되는기여, 그래 일본놈들이 하도 지랄을 해 싸서 명주 길쌈은 집에서 못허고 산골에 가서 했다니께. 밤에 촛불 켜 놓고 불 때 가민서 실 뽑았어. 그래 가지고 짠기여, 춘포가…, 그래 이제 그거 다 짜민 청양장이 2일 7일장이거든, 청양읍에 가민 그때 거간들이 서넛은 있었어, 그 사람들한테 맡기믄 다 알아서 팔아 주고 했는디, 오랜만에 돈이 생기니 새끼들 믹일 쌀을 팔아서 들고 가야 허는디 그걸로 홀랑 술을 걸탕허니 묵고 흔들흔들 들어온단 말이여. 그라믄 그 날이 내외간에 일 나는 날이여. 불안한기여, 그런 날은 새끼들 믹일려고 고생 고생하미 춘포 짰더만 그걸로 술만 마시고 들어온다고 색시가 한바탕 난리를 하지, 별 야단이 다 났어. 그라다가 일정 때 누가 구기자를 심기 시작했어, 구기자가 솔솔허니 돈이 된다고 허니께 전부 그걸 심고 춘포는 그때부터 안 했어, 그때 신식 옷감들이 한두 가지 나왔는가. 별것들이 다 나오니께 그때부터 춘포들을 안하더라구, 누가 허간디. 힘도 들고 품도 많이 들고 생고생을 허는 것인디…”

정작 베를 짜는 할머니는 구경꾼으로 앉혀두고 할아버지와 베 짜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어색하기는 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마을에서 누가 처음 했는지는 아세요” “몰러, 그걸 어쩌케 알간디. 이 집 저 집에서들 허니께 다 눈으로 보고 배운거지, 지금처럼 책이 있간디, 테레비가 있간디 안 그려” “다른 옷감들은 실을 한 가지만 사용하는데 이건 두 가지 실을 사용한다면서요. 그렇게 하면 좋은게 있으니까 그렇게 했겠죠” “암, 좋은게 있지. 옛날에 각 지방마다 내로라하는 한량들은 여름에 다 춘포로다 옷 지어 입었지 다른 걸로 맨든거는 안 입었어. 춘포로다 맨든거는 멀리서 봐도 딱 알아보거든, 모시로만 맨들어 놓으믄 시원허긴 한데 손도 많이 가고 뻣뻣허니 그랬는디 춘포로다 옷을 지어 놓으믄 모시처럼 시원하기도 하고 명주실이 들어가니께 옷이 날창날창혀서 멋 부리는 사람들이 많이 입었어. 나도 젊었을 직에는 춘포로 옷 해 입고 청양읍에 나가고 그랬는디 색깔도 다르고 벌써 사람 때깔이 달라 보여. 생각혀 봐, 모시에다 비단이 섞여있으니 시원하기도 하고 보드랍기도 하고 그렇다니께.”

보국대 싫어 시집와 열아홉 때부터

그이의 말과 같이 춘포는 겨우내 모시실을 길쌈 해 놓고 누에가 고치를 만들어 내는 음력 4월경에 고치에서 명주실을 자아내서 짜기 시작한다. 할아버지의 말처럼 춘포로 짠 옷은 여름에 많이 입었으므로 여름이 오기 전에 짜내는 옷감이었던 것이다. 명주실은 날실로 베틀에서 도투마리에 감겨 있는 실로 사용하고 모시실은 딸실, 베를 짤 때 북에다 넣는 씨실을 삼아 짠 옷감이다. 다 짜고 나면 치잣물을 은근히 들여야만 완성된다. 이만큼이나 이야기하고서야 겨우 춘포가 잇는 곳으로 갈 수 있었다. 그곳은 베틀을 놓아 둔 사랑채였다.

할아버지는 그곳까지 따라 왔지만 할머니에게 물었다. “할머니 시집은 언제 오셨어요” “시집, 열 아홉에 왔지. 내가 올해 일흔 둘 인께, 53년이나 됐나, 일정 때 처녀들 다 잡아 갔잖아, 보국대 보낸다고 시집 안간 처녀들은 다 잡아 갔거든. 마을에서 모집을 했었어. 그라니께 딸 가진 부모들은 전부 시집보낼라고 난리를 했어. 그래 우리 부모들도 딸이 잡혀가는 것보다는 나으니께 시집을 홀랑 보낸기여. 5월 단오 날이여 그날이, 내 고향은 대치라고 거기는 가 봤나, 칠갑산 들어가는 큰 고개, 그 고개에서 산중으로 깊숙허니 들어가야 허는데 까치내라고 허는데여. 거게서 여게로 시집 온기여. 시집이라고 오믄 뭐 혀. 뭘, 알간디. 그냥 시키는대로 하고 그랬는디, 시어머니가 베틀 놓고 춘포를 짜고 있는기여. 시어머니는 그러께 돌아 가셨는디 아흔 다섯에 이무롭게 돌아가셨어. 어머니가 베를 짜고 있는디 내가 몰라라 헐 수 있어 어디, 농사 짖고 베 짜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허는기여. 말도 말어, 그 이야기를 어츠케 다 혀”

이지누/글쓰는 사진가
하지만 들리는 이야기로는 그니의 며느리가 다시 베틀을 잡았다고 한다. 할머니 당신이 한 고생을 고스란히 며느리에게 대물림 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과연 그것이 고생만이겠는가 하고 말이다. 책상에 앉아 머리로만 생각하니 힘든 것을 몰라 그런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춘포 그 자체 보다는 유쾌한 수다쟁이 할아버지와 얌전하기만 한 할머니의 집안에서 같은 일을 5대째 대대로 물림을 한다는 것에 더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그것은 지금과 같은 사회에 더 없이 강력한 브랜드이며 대물림의 손끝에서 나오는 그 무엇이라도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 또한 어김없이 긴 세월동안 이어져 온 솜씨의 매력에 젖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물림이 끊어지는 것을 장인들의 몫으로만 돌리기에는 무리가 있다. 서양의 명품이라고 하는 것들의 100년 세월에는 까닭모를 후한 점수를 주며 비싼 값을 치르면서도 우리 것에는 인색한 것은 장인들이 아니라 우리들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것을 문화로 이끌어 올릴 사람들 또한 장인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은 아닐지 생각 해봐야 할 일이다.

이지누/글쓰는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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