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9.06 20:32
수정 : 2006.09.07 09:36
강주연 패션 어드벤처
키가 작아 하이힐만 고집하다가 요즘 유난히 플랫(flat) 슈즈를 즐겨 신게 되었다. ‘플랫’이라는 말 그대로 땅 바닥에 딱 붙어 있는 듯해 보일 만큼 굽이 전혀 없는 일명, ‘발레리나 슈즈’라고도 불리는 신발이다. 몇 시즌 전부터 이 플랫 슈즈는 할리우드 스타들을 비롯해 패션 리더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많은 여성들에게도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오후 나절쯤 되면 발목과 종아리가 뻐근해지는 10cm짜리 하이힐 대신 이 납작한 플랫을 신어 보니, 일단 날아갈 듯 편했다. 편하니 활동량도 많아지고 하던 일도 평소보다 더 적극적으로 하게 되는 것 같았다. 내 작은 키가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것은 여전히 흠으로 남았으나 긴 바지 속에 높은 굽을 숨긴 채 속 보이는 사기(?)를 치는 것보단 왠지 더 ‘쿨 해’ 보이는 것 같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눈이 먼다’는 표현을 쓰는 것처럼 패션에서는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난다. 유행(트렌드)이라는 것이 어찌나 오묘하고 얄궂은지, 이런 스타일이 유행이다 싶으면 갑자기 그것이 그리 예뻐 보일 수가 없는 것이며, 어떻게든 손에 넣고 싶어지게 된다. 그것이 유행의 매력이자, 마력이며 패션이 가진 가장 큰 재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평소 내게는 어울리지 않을 거라며 멀리했던 플랫 슈즈가 갑자기 매력적으로 보이게 된 데에는 뭔가 다른 근원적인 이유라도 있지 않았을까.
되짚어 보니, 뇌리 속에 저장된 오래된 흑백 사진과 영화들 속, 플랫 슈즈를 신은, 심플하면서도 아름다운 오드리 헵번의 모습이 먼저 떠올랐다. 1950년대, 혁신적인 숏 컷트와 디자이너 지방시의 모던한 의상으로 당시 패션계에 선풍을 일으켰던 오드리 헵번, 그녀가 신었던 이 납작한 플랫 슈즈 역시 지구촌 여성들의 ‘눈을 멀게’ 하기에 충분했었다. ‘흠, 유행은 돌고 돌아 50년이 흐른 지금 내 눈도 멀게 하고 있는 것이로구나.’ 내가 내린 잠정적인 결론은 일단 여기까지였다.
그런데 며칠 전 어머니의 부엌에서 발견한 검정 고무신을 보고 그 결론을 수정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딱 적당할 만큼 동그란 앞코와 잘 빠진 옆 라인은 최고의 플랫 슈즈 디자인을 내놓았던 랑방의 알버 엘바즈의 그것과 다름없었다. 어린 시절 기억 속에 어렴풋한 그 검정 고무신의 아름다움을 나는 태평양과 대서양을 몇 번 건너고 세월을 몇 십 년 거슬러 올라가는 길을 돌아돌아 이제야 발견한 것이다. 오드리 헵번이 신어서 예뻐 보인 신발이라 생각했던 플랫 슈즈는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신던 검정 고무신이었다. 그러고 보니 얼마전 한국을 방문했던 프랑스 수입 브랜드 셀린느의 수석 디자이너 이바나 오마직(Ivana Omazic)도 남산의 한옥마을에서 발견한 짚신을 보고 그 아름다움에 놀라워하며 ‘Sexy Shoes’라고 이름 붙이기도 했었다.
전교에서 1등하는 맏형처럼 승승장구하고 있는 영화 산업을 늘 부러운 시선으로 샘하는 패션인의 한 사람으로서 이제는 한강변에 괴물이 등장한다는 스토리도, 시공을 초월하여 사랑을 나눈다는 러브 스토리도 아무렇지 않게 세계인의 공감을 얻어내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한 수 배워야 한다고 절감한다. 우리의 것이 아름다우려면 반드시 가야금과 꽹과리를 쳐야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동시대적으로 고스란히 전달될 수 있다는 우리의 아름다움을 담은 디자인을 창조하고 이것을 전세계가 공감할 수 있는 그런 날을 패션에서도 하루 빨리 맞이하고 싶다.
엘르 패션 디렉터 강주연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