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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의 동강 가에 사는 이경윤 씨. 그는 나의 술 선생이자 노름 선생이다. 살면서 이만한 고수를 만나기는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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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신 술 풀어 놓으면 동강물보다 못하지 않고
아편 할라고 비료 훔치다 유치장 신세도 져봤고
물려받은 전답 팔아 투전판 3년만에 ‘홀랑’했고
혼인도 해봤고 십여명과 살림도 차려봤다는 ‘건달’
사나이 그만하면 됐지 뭘 더바라겠소
이지누의 인물로 세상읽기/영월 동강변 비닐하우스에 홀로 살던 이경윤씨
그이에게 나는 이씨였다. 보자마자부터 대뜸 그렇게 불렀다. 그것은 사회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방어하고 자신의 교양머리를 자랑하듯 상대를 높여주는 빤지르르한 외교적 호칭이 아니었다. 그이에게 나는 자기와 다를 것이 없는 건달처럼 보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묘한 것은 나 또한 그 호칭이 그리 싫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대놓고 이씨라고 불러주니 감출 것 없이 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그 어느 때 보다 편했다.
강가의 깊은 산골로 찾아가 너덧 번이나 만났을까, 그이가 물었다. “이씨는 이래 다니믄 누가 돈을 주는가 그래” 이런 질문은 비단 그이만이 아니라 전국 방방곡곡에서 내가 만난 어르신들이라면 누구라도 한번은 던졌던 질문이기도 하다. 그것은 반드시 나의 벌이에 대해서 궁금하여 던진 질문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 안다. 뭇사람들이 다녀가더라도 대개 한번 스쳐 가면 그뿐인데 부러 자신을 찾아 부득부득 먼 곳까지 오는 것이 고마워서 던지는 미안함의 표현일 것이다.
“이래 다니믄 누가 돈 주나 그래”
그이는 이경윤이다. 내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그이는 깊은 산골을 흐르는 강가에 살고 있었으며 나이는 육십을 넘겼지만 칠십은 채 되지 않았다. 집이라고는 비닐하우스가 전부였다. 강가 어디 우묵한 곳에 얼기설기 파이프를 박고 그 위에 비닐을 씌웠지만 안에 들어가면 아궁이도 있고 번듯한 방 한 칸도 있었다. 전기는 들어오지 않아 밤이면 초를 밝히고 낮이면 “갑갑시럽다”며 항상 열어두는 들창이 고작이었다. 부엌살림이라고 해야 혼자 먹는 밥을 끓이는 냄비와 국 냄비 그리고 물을 끓이는 솥단지 하나가 전부였으며 방에 들어앉은 세간 또한 부엌과 별 다를 것 없이 소박하다 못해 초라하게 느껴 질 정도였다.
그러나 그이는 그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만하게 살 수 있는 것도 과분하다며 너스레를 떨곤 했다. 그렇다고 그이가 윌든 호숫가에 오두막을 짓고 살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와 같은 부류의 사람은 아니다. 되레 그이는 세상 속에 더 이상 발붙일 곳이 없어 떠밀린 부초와도 같은 사람이니까 말이다. 앞서 말했지만 그이는 스스로를 건달이라고 표현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렇다고 부끄러워하지도 않았으며 자랑스러운 여운을 남기거나 뻔뻔스럽지도 않았다. 그저 덤덤하게 웃으며 말할 뿐이었다. “아, 이씨가 생각 해 보오. 내가 지금 세상에 부러운 게 뭐 있소, 술도 마실 만큼 마셔봤고, 돈도 쓸 만큼 써 봤고 마누라도 얻을 만큼 얻어 봤으이 뭐 부러운 게 있겠소. 전에 이씨가 여 처음 왔을 때 말했지 않소, 내가 마신 술을 전부 풀어 놓으면 저 앞에 흘러가는 강물 보다 많으면 많앴지 못하지는 않을 거라고 말이오. 사나이가 그만하면 됐지, 또 뭘 바라겠소, 안 그렇소.” 그이는 열일곱부터 술을 마셨다고 했다. 한창 술을 마실 때는 낮부터 마신 술이 언제 새벽이 왔다가 갔는지 다시 한낮의 땡볕과 마주쳤다가 새벽이슬에 젖기를 두어 차례 할 때까지도 꼬꾸라지지 않고 들이 부었다고 한다. 거기에 서른 살 언저리에는 아편에 빠져 단 하루라도 그것 없이는 견디지 못한 날이 숱했다고 하니 그와 덩달아 그이를 따라 다닌 것은 투전投錢이었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투전은 돈치기이며 돈치기는 동전을 땅바닥에 던져서 무엇을 맞히는 놀이를 일컫는다. 그러니 돈 놓고 돈 먹기이며 곧 노름을 말한다. “아이구 그때는 도둑놈들이 버글버글했어요. 밭이고 논이고 약방에 가믄 아편이 우글우글한데 돈이 없으니 어떡하오. 그러이 남의 밭이고 논이고 할 거 없이 마구 돌아 댕기미 닥치는 대로 훔쳐다 팔아서 그 돈으로 아편을 사고 안 그랬소. 그래 그 돈으로 한 대 맞고 나믄 힘이 얼매나 나는지, 쌀 한 가마이 지고 가지도 못하던 길을 두 가마이 지고도 단창 간단 말이오. 나도 그 짓 할라고 남의 비료 팔아먹다가 잽혀서 원주 유치장에 한 보름 갔다 오지 않았소. 참 지랄을 했지, 내 돈 없으믄 돈푼이나 있는 놈을 아편쟁이를 만든다 말이오. 그래야 그놈 할 때 조금이라도 얻어서 할 수 있지 않겠소. 별 머리를 다 굴리고 그래 살았소. 그때는 세월이 그랬소. 내 살던 골짜기 사람들치고 그거 안 한 사람 하나도 없으이, 우리 큰 집 형님도 날더러 그거 한다고 막 야단치시더이 자기가 몸이 아프니까 당장 그걸 찾고 그랬다 말이오. 그래 한 대 맞고 나면 제깍 안 아프이 신기하지 않소. 그때부터 형님도 그거 했지, 노인들 담 든 것도 감쪽같고 토사곽란도 그거 한 대만 맞으면 뭔 일이 있었나 싶게 말짱했었다 말이오.” 왜 그리 마셨냐고? 내 어찌 알겠소 그이 말 중에 내 가슴에 꽂히는 말은 “그때는 세월이 그랬소.”라는 것이었다. 사실 그 다음의 말은 녹음기에 남은 것을 풀어 쓴 것일 뿐, 내 감각기관은 그 말이 나오는 순간에 꼼짝도 하지 않고 멈춰 버렸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당시의 삶을 순도 100%를 유지한 채 고밀도로 농축한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그 농축된 표현 속에 내재한 모습들을 하나 둘씩 이미지로 떠올려 보라. 그 암담하고 슬픈 장면들을 말이다. 술은 또 왜 그렇게 많이 먹었느냐고 물으니 그 까닭은 모른단다. “나보고 술을 왜 먹었냐고 하면 나는 모르지, 그걸 내가 어찌 알겠소. 그저 술이라믄 사족을 못 쓰고…, 전에는 전부 뿌연 양은 대접이랐다 말이오. 잔술은 귀찮아서 어디 먹기나 하겠소. 대접에다가 따라야 그저 목을 축인다 싶고 그랬지, 댓병이라야 그 대접으로 딱 두 대접 나왔는데 그 대접으로 한 세 대접씩은 먹어야 좀 딸딸하고 그랬지 않소. 한번 자리에 앉으믄 그 정도는 해야 일어나고 그랬지, 안주라고 뭐가 있겠소. 소금이라도 찍어 먹으믄 다행이고, 술 마시고 또랑물로 입만 한번 부시믄 그게 안주지, 술도 요새는 돈 내고 슈퍼 같은데서 사먹지 전에는 돈이 없으이 집에서 만들어 먹었지 않소. 강냉이로 맨든 술이 그거이 독하고 그래도 한잔씩 하믄 달콤 쌉쌀한기 최고랐지…, 전국을 댕기미 먹어봐도 그만한 술이 없어” 그이는 전국을 떠돌았다고 했다. 그래도 강원도 언저리를 맴도는 시간이 많긴 했지만 안 가본 곳 없이 다녔으니 또 만난 여자들은 한둘이었겠는가. 그이는 이제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고 했다. 제대로 된 결혼은 한 번 밖에 하지 않았지만 살을 맞대고 잠시라도 같이 산 사람은 얼추 열 명에 가깝다고 했으니 그것은 부러워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슬픈 일인 것이다. 그것은 그이가 어디 한 곳에 머물지 못했다는 반증이니까 말이다. 심수봉의 노랫말에도 나오지 않는가.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그렇게 떠돌았으니 노름인들 그를 피해갔겠는가. 오히려 푹 절어서 지냈을 것이다. 노름해서 집 산 놈 여태 못봤으니 “투전, 그놈의 것은 아편보다 더하믄 더했지 못하지는 않다 말이오, 한번은 내 살던 골짜기에서 투전방으로 나가는데 마누라가 신발을 감춰 버렸지 않소. 투전이 농사 일 끝나고 찬바람 불 때부터 한겨울이라야 모이는 사람들도 많고 판도 크고 그렇다 말이오. 그러이 집에 있으믄 화투짝이 삼삼하게 눈에 들어오고 참지를 못해, 아편은 몸이 배배 꼬이지만 이놈의 투전을 못하믄 눈이 배배 꼬인다 말이오. 그러이 그날도 한겨울 이랐지 않소, 살금살금 마누라 몰래 나가는데 신발이 없다고 한 번 나선 길을 물릴 수도 없고 그냥 나갔다 말이오, 양말이라고 지금 같은 것도 아니고 광목 둘둘 감아서 신고 나갔는데 신도 없이 강 옆 자갈길을 걸어가니 금방 떨어져 나가고 없지 않겠소. 그라이 맨발로 십리가 넘는 길을 걸어 투전판으로 가지 않았소. 맨발로 얼음 언 강도 건너고 그라이 발바닥에 물기가 있어 자갈이고 모래가 자꾸 발바닥에 달라붙어서 아프기는 얼매나 아프던지, 그라고 투전을 하러 댕깃다 말이오. 미쳤지, 그런 날이 하루 이틀이겠소. 날마다 그랬지. 그러이 여자가 살지 못하고 도망가고 또 새 여자 꼬드겨 살고 그랬지…” 그이에게 지금까지 살면서 안했으면 좋았을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술이라고 할 줄 알았는데 거침없이 투전이라고 했다. “내가 처음에 집안의 어른이 물려 준 전답 전부 팔아서 걸망에 돈뭉치를 넣고 다니며 전국을 떠돌지 않았소. 가만 생각해 보오. 우리 부모네들이 평생을 일궈서 만든 땅을 홀랑 까먹는데 삼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말이오. 미친 짓이지, 미치지 않고는 그걸 홀랑 잃어버릴 수는 없는 일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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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누/글쓰는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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