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9.07 16:56
수정 : 2006.09.08 14:56
“물망에 오르다, 하마평이 무성하다, 낙점하다, 유력하게 거론되다 …”
관직 인사 때 흔히 나오는 말들이다.
여기서 ‘하마평’(下馬評)은 일본에서 건너온 말이다. 노둣돌 곧 ‘하마석’은 있어도 ‘하마평’이라면 어울리지 않는 조어인 까닭에 쓰기를 삼간다. 대신 물망(物望)을 많이 쓰는데, 대상자로 거론되는 이들을 물망에 올랐다고 한다. 아무리 제도·절차가 달라지고 명경알 같은 시대가 되었다고는 하나 골목공론·쑥덕공론은 따라다니기 마련이다.
인사뿐만 아니라 정책·방안을 결정할 때도 ‘거론되다·검토되다’ 식으로 말하는데, 이는 책임을 비켜가려는 말법이다.
흔히 물망에 오른 이 가운데서 유력한 사람을 두고 “유력하게 거론되다, 유력하게 검토하다”라고 쓴다. 이는 “유력한 대상자로 거론된다, 유력한 후보(방안)로 검토한다”는 뜻으로 쓰는 듯하나 의미상 호응이 되지 않는다.
이 말이 형식상 ‘부사어+서술어’ 짜임을 갖추기는 했지만 실제에서 모순이 벌어진다는 말이다. 곧 ‘힘있게, 힘차게, 세게’ 거론·검토한다는 말인데, 아무리 거론하고 검토하는 일 자체가 힘차고 힘있어 봤자 시끄럽기만 할 뿐 당사자가 유력하고 유력하지 않고와는 상관이 없다.
자릿수를 늘리지 않으려면 그냥 “긍정적으로 거론하다, 적극적으로 검토하다” 정도로 바꿔 쓰는 게 낫다. 달리는 “유력한 방안(인물)으로 거론(검토)한다”도 말이 된다.
‘누구를(무엇을) 적극적으로·긍정적으로·신중하게’ 검토해야 객체를 고려한 느낌을 아우르게 된다. 이는 ‘유력하다’가 서술어·관형어 구실에 어울리지 부사어(유력하게)로 써먹기에는 적절하지 않다는 말이 된다.
또한 관형어 ‘유력한’과 ‘검토·거론’도 어울리지 않는다. 검토·거론이란 조심스럽거나 적극적·긍정적으로 하는 행위 곧 움직임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건교부는 시공사 선정의 투명성 확보를 위해 총회 때 재적 조합원 과반수 이상이 직접 참석해 과반수 이상의 찬성으로 결의한 것만 인정하는 방안을 유력하게 검토 중이다 → ~ 인정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특히 ○ 장관은 1년반 가량 기획예산처 장관을 맡으며 국정현안 전반을 잘 파악하고 있고, 후반기 역점 정책들을 뒷받침하게 하고자 정책실장으로 유력하게 검토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 ~ 국정현안 전반을 꿰뚫고 있는데다 후반기 역점 정책들을 뒤받침하는 데 적임자로 보고 적극적으로 검토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위원장에는 재선급인 ○ 의원이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 ○○위원장에는 재선급인 ○ 의원이 유력한 후보로 거론된다.
△대검 중수부는 24일 소환되는 ○○○ ○○그룹 회장을 구속 수사하는 방안을 유력하게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 구속수사하는 방침을 굳힌 것으로 알려졌다.
△학연·지연으로 깊은 관계가 있는 한 변호사의 이름도 유력하게 오르내리고 있다 → 학연·지연으로 관계가 깊은 한 변호사도 물망에 오르내리고 있다.
△유동적인 남북상황에 따라 단계적 확대안이 유력하게 검토되는 단계다 → 남북 상황이 유동적이어서 단계적 확대안을 검토하는 단계다.
△그동안 유력하게 검토하던 배양과정을 다시 시연하는 방안도 결론을 내지 못한 것으로 확인됐다 → 그동안 긍정적으로 검토하던 ~.
최인호/한겨레말글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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