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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기 통일신라 와당의 걸작인 두마리 새무늬(쌍조문) 수막새. 도톰하게 살 오른 새 두 마리가 함께 문 나무줄기를 중심으로 마주보는 모습이나 문양의 뜻이나 기원은 아직 수수께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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⑨ 옛 기와 “…요술쟁이처럼 신라인의 손을 거치면 모든 것이 예술품으로 변모된다. 와당(瓦當)도 예외는 아니어서 지붕을 장식하는 극히 부속적 존재였으나 역시 고구려·백제·신라·통일신라를 거치는 동안 공예품이자 조각품으로서의 성격을 획득하였으니 와당을 통하여 다시 한번 한국 문화의 일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미술사가인 강우방 이화여대 교수는 <한국와당예술론서설> 이란 논문에서 옛 와당의 예술사적 의미를 재치있게 풀이해 놓았다. 와당이란 기와지붕에서 날렵하게 뻗어내려오는 기와등의 끝을 맺음새하는 부재인 수막새, 암막새를 일컫는 말이다. 지금 우리 눈에 기와는 단순히 지붕을 이고, 침수를 막는 옛 부재로 비춰지기 일쑤다. 하지만, 여러 종류의 기와 표면에 당대인들의 세계관과 소망을 다기한 문양 장식으로 새겨넣으며 심미적 대상으로 승화시킨 삼국시대 기와 장인들은 기능성에 머물지 않고 일상에서 미학적 가치를 실천하는데 누구보다 투철했던 심미안의 소유자들이었다. 고려청자, 금속활자 문화에 눌린 감이 있지만 이땅의 기와문화는 문화교류의 우뚝한 성취 가운데 하나다. 기와양식은 중국 주나라에서 비롯되어 한나라 때 고조선에 흘러들어온 것으로 보고있다. 그러나 나중난 뿔이 우뚝한 것처럼 삼국시대 이후 장인들은 중국 것을 압도하는 고품격의 예술기와를 만들어낸다. 신라, 고구려, 백제 와당의 질박·강건·온화한 연잎 무늬는 통일신라에 이르러 수백종에 달하는 극도로, 호화롭고 정교한 당초·보상화무늬·짐무늬 등의 디자인 별세계를 구현했다. 심지어 삼국의 예술 문화가 한민족의 보편성 속에서도 분명한 갈래를 지었다는 것까지 기와 문양은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와당 연꽃무늬의 빳빳한 돌기를 내세운 고구려 기와의 강고함, 하트를 떠올리게 하는 부드럽고 자연스런 연잎 끝의 말림과 평면성 돋보이는 백제 와당의 온기, 투박하면서도 씩씩한 신라 와당의 고졸함 등등이 그렇다. ‘신라의 미소’로 유명한 흥륜사터 출토의 웃는 얼굴 와당이나 한폭의 걸작 산수화인 백제 산수무늬 전돌 등에서 보이듯 당대 기와장인들은 조각·공예·회화 분야에도 달관한 전문가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저 유명한 경주 사천왕사터의 소조 사천왕상판을 만든 고승 양지스님 또한 걸출한 기와 장인이었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신라의 미소·백제 산수무늬 전돌…
조각·공예·회화 ‘지붕위의 종합예술’
조선시대 문양보다 ‘이용후생’ 치중 기와를 보는 시각의 변천사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오늘날 고대 기와는 문양의 아름다운 형식미를 통해 재발견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선비들에게 기와는 민생구제와 이용후생이나 덕스런 통치의 상징물로 우선 받아들여졌던 듯 하다. 조선초의 대학자 김종직은 <점필재집>에 경상도 함양현감 시절 백성들의 집을 기와로 이어준 치적을 슬쩍 자랑하는 시를 적었다.‘이백 사십여 간가나 되는 집들은 /비바람으로 해마다 수리가 잦았네 /때가 어려워 일천 가호 동원할 일 걱정됐으나…/도끼 자귀로 착착 깎는 소리 일찍 거두고 / 나란하게 기와 이으니 안목이 일신되었네 ’ 실학자들도 사정은 비슷해서 이익은 <성호사설>의 ‘와옥(瓦屋)’편에서 각 고을에 기와 만드는 계를 설치해야 한다는 반계 유형원의 견해를 소개하면서 “토목(土木)이 편리하고 가까운 곳에 와국을 설치하여 기와를 구워 내고 백성에게 무역하게 한다면, 원대한 생각을 하게 될 것이고, 또한 백성 거느리는 방법은 함부로 이사 다니지 못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니, 이미 기와집이 있으면 곧 자리잡아 사는 시초가 되므로 기와 굽는 제도를 빨리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연암 박지원도 청나라 기행기인 <열하일기>에서 청나라 사람들의 “장관은 기와조각에 있고, 똥 부스러기에도 있다”는 명언을 남긴다. 곧 조선에서는 천하에 버리는 물건인 깨어진 기와조각이 중국에서는 포개거나 모으면 저절로 좋은 무늬가 될 정도로 반듯하게 규격화되어 있는데, 왜 우리는 후진적 제조법을 쓰느냐는 힐난인 셈이다.
한편으로 기와는 조선후기 북학파 등장 이후 지식인 사회에서 골동취미감으로 환영받기도 했다. 고대 중국 문물을 찾아 학문적 가르침을 얻는 청나라의 고증학, 금석학풍이 성행하면서 중국에서 들여온 옛 와당이나 탁본 따위가 열광적인 컬렉션 대상이 되었다. 박제가 또한 이런 흐름에 취해 <진한와당가>란 시를 남겼으니, 와당 보고 법고창신을 음미했던 그네들의 고고한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다. “금석문이 다 나오자 와당이 뒤 이으니/ 인간세상 아득하여 이 또한 옛 것일세/… 오늘날 소전(전서체의 고아한 글씨)을 배우는 사람들은 이 마흔개 와당문을 읽어야 하리.” 애초 지붕에 물새는 것을 막고 건물골격을 잡기 위해 고안한 건축재가 미학적 가치관의 변천사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증거물로 남았다는 사실은 흥미로운 역설이 아닐 수 없다.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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