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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3.06 19:28 수정 : 2005.03.06 19:28

단행본 40년 외길…“출판 위상회복” 외치며 다시 일선으로

박맹호 회장은 40년 동안 굵직한 발자국을 찍으며 단행본 출판의 외길을 걸어온 대표적 출판인이다. 1934년 충북 보은에서 태어나 56년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한 그는 66년 도서출판 민음사를 세워 인문 출판의 아성으로 세웠다. 70년대부터 젊은 시인과 소설가들의 작품으로 ‘오늘의 시인총서’와 ‘오늘의 작가총서’를 발간했고 문학계간지 <세계의 문학>을 발간했으며, ‘오늘의 작가상’과 ‘김수영문학상’을 제정해 수많은 문인들을 발굴하고 지원했다. 80년대에는 ‘대우학술총서’를 펴내기 시작해 20년 가까이 모두 424권을 펴냈다. 94년에는 “손주에게 읽힐 만한 어린이책을 내보려고” 어린이책 전문 자회사 ‘비룡소’를 세웠고, 96년에는 대중문화 전문 출판사 ‘황금가지’를 세웠다. “출판인재들이 안심하고 일할 만큼 대우해주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97년에는 과학 전문 출판사 ‘사이언스북스’를 설립했다. 그가 만든 출판사들은 모두 해당 분야의 주도적 지위를 점하고 있다. 지난해 민음사 그룹 매출액은 300억원에 이르러 단행본 출판사 가운데 최상위권에 들었다. 올해 초 민음사 그룹 경영을 자녀들에게 맡기고 2선으로 물러났다. 그는 “이제 은퇴해서 쉬어보려고 했는데, 출판이들의 간곡한 권유를 끝까지 저버릴 수 없었다”며 “이왕 맡은 일, 몸과 마음을 다 바쳐서 출판계에 도움이 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출판은 벤처…책 한권 한권이 벤처”

“책은 없었습니다!” 박맹호(71) 민음사 회장이 한국 출판계의 대표 단체인 대한출판문화협회(출협) 45대 회장 선거에 나섰을 때 그가 내놓은 팸플릿은 이 난데없는 부정문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텔레비전에 매일같이 등장하는 공익광고가 ‘당신이 산 시디가 보아를 만들었습니다’, ‘당신이 산 영화표가 올드보이를 만들었습니다’라고 단언하는 그 자리에 책 사진 한 장 끼어들지 못했다는 점을 환기시키는 한마디였다. 한국 출판의 현주소를 이보다 더 선명하게 드러내는 말도 없을 것이다. 박 명예회장은 한국 출판의 위상과 명예를 회복하겠다는 의지를 이 구호에 담아 지난달 24일 치러진 출협 회장 선거에서 이정일 전임 회장을 큰 표 차로 누르고 당선됐다. 그의 당선은 수십년 동안 출협을 좌우했던 학습지·참고서·전집류 출판인들을 대신해 인문·사회·교양 부문 단행본 출판인들이 지도부로 올라섰다는 점에서 출판계의 일대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한 7개월 앞으로 다가온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주빈국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러야 할 새 수장을 뽑았다는 점에서도 출판계 안팎의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당선과 동시에 숨돌릴 틈도 없이 산적한 현안으로 뛰어든 박 신임 회장을 대한출판문화회관 회의실에서 만났다.

20년전엔 출판이 아니라 출판운동이었지요
정부가 계속 눈길 안주면 미래 빼앗기는 것
세계도약 발판될 프랑크푸르트도서전 낙관

­과거에도 한 차례 출협 회장직에 도전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꼭 20년 전이었습니다. 전두환 정권 말기였는데, 출판자유를 위한 저항운동 차원에서 나선 것이었습니다. 당시 단행본 출판계는 반독재 운동의 중요한 축이었습니다. 20~30대 진보적 출판인들의 모임인 금요회가 있었고, 40~50대 출판인들이 모인 수요회가 있었는데, 저는 수요회에 속해 있었지요. 이 두 세대가 일치단결해 사실상 정권과 싸운 것이 그 선거였습니다. 치안본부·서울시경이 선거과정을 일일이 감시했고, 심지어는 안기부와 보안사까지 개입해들어와 선거캠프는 물론이고 집과 출판사 사무실까지 뒤지고 다녔습니다. 선거에 패한 뒤에도 보복을 당했고 피해를 입었지요.

­역설적으로 그 시절 한국 출판이 그만큼 강력했다는 뜻도 되겠군요.

=그렇습니다. 출판은 단순히 출판이 아니라 출판운동이었습니다. 그만큼 출판인들의 의지도 강했고 사회적 영향력도 컸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출판이 지닌 중요성이나 상징성에 비해 위상이 너무 낮습니다. 출판이 실제로 하고 있는 사회적 구실에 맞게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우선은 위정자들의 철학과 비전의 문제라고 봅니다. 출판이 얼마나 중요한 문화산업인지 절실히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문제는 우리 내부에 있습니다. 출판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보면 자질도 뛰어나고 아주 역동적입니다. 출판의 외형만 따져도 세계 10대 출판 강국에 우리나라가 들어갑니다. 출판인들의 역량 덕이지요. 다만 그런 개별적 역량을 하나로 모아 더 큰 힘으로 끌어올리지 못한 게 문제였습니다. 출판단체가 출판인들의 여망을 수렴해 큰 흐름을 만들고 활력을 키우는 데 조직적으로 나서지 못했던 것이지요.

­이번 선거에서 그 열망이 분출했다고들 하는데요.

=그렇게 느꼈습니다. 저를 도왔던 출판인들이 하나같이 자기 일로 알고 전력투구했습니다. 어찌 보면 그분들이나 저나 개별 출판인으로서는 서로 경쟁자라고 할 수도 있는데, 정책을 만들고 홍보물을 제작하고 사람을 모으고 하는 일에 발벗고 뛰었어요. 모두들 우리 출판을 바로잡아야 한다, 출협을 그 본디 중요성에 걸맞게 바로 세워야 한다는 의지가 대단했습니다.

­그 열망이 결국은 구체적인 일로 실현돼야 할 텐데, 가장 힘주어 할 일이 무엇입니까?

=선거에 나서면서 첫 번째 공약으로 내걸었던 것이기도 한데, 출판계의 싱크탱크를 만드는 일입니다. 회장 직속으로 ‘지식산업 발전을 위한 특별위원회’를 설치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뿔뿔이 흩어져 있는 출판계의 두뇌를 모으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지식정보사회로 급변하고 있고, 세계가 그 방향으로 빠르게 바뀌고 있습니다. 출판은 이 지식정보사회의 핵심 역량입니다. 출판산업을 최신 정보와 고급 지식이 펼쳐지는 마당으로 만들려면 그만큼 국가와 사회의 지원이 필요합니다. 출판계 안팎의 인재를 조직해 정부의 문화정책, 교육정책을 혁신하는 데 지혜를 모으겠습니다. 출판계의 중요한 현안이 집중적으로 논의되는 출판문화의 최전선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출판인들이 가장 자주 하는 말이 ‘출판이야말로 문화의 인프라스트럭처다’라는 것인데요.

=그렇습니다. 생각해보세요. 공항·항만·도로 같은 눈에 보이는 인프라 구축에는 막대한 돈을 투자하면서, 우리 미래를 책임지는 지식정보 산업에는 눈을 돌리지 않고 있습니다. 정부의 문화산업 예산이 2천억원 쯤 되는데, 그 대부분이 영화·게임·음반 같은 대중문화에 들어가고 정작 그 문화의 토대를 이루는 출판분야에는 5%도 채 배정되지 않고 있습니다. 인문과학·사회과학·순수과학 출판은 한 사회의 기초체력을 쌓는 일입니다. 지금처럼 정부가 외면한다면, 출판에 고급인력이 들어오지 않고 그나마 있는 인력마저 빠져나가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미래를 빼앗기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 출판 인프라 구축을 위해 어떤 구체적인 방안이 있겠습니까?

=우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출판은행’ 설립입니다. 좋은 책을 내겠다는 의지도 충만하고 구상도 잡혀 있는데, 돈에 쪼들려서 책을 만들지 못하는 불행한 사태만은 막아야 합니다. 뜻은 있되 돈은 없는 출판인들을 돕는 것이 출판은행입니다. 출판이란 달리 보면 일종의 벤처입니다. 책 한 권 한 권이 벤처입니다. 책 한 권 속에 담긴 아이디어가 막대한 국부를 낳을 수 있습니다. 우리 정부는 100개의 벤처기업 중에 하나만 성공해도 된다는 자세로 벤처산업을 지원해왔습니다. 그런 태도로 출판에 관심을 보인다면, 꼿꼿한 출판정신으로 문화의 지평을 넓히고 있는 출판인들이 큰 힘을 받을 것입니다.

­출판산업이 안고 있는 현안 가운데 하나가 ‘도서 정가제’입니다. 정가제는 출판유통의 기초와 같은데, 그 질서가 흔들리고 있다는 걱정이 많습니다.

=출판인들에게서 그런 말을 많이 들었고,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정가제에 대한 제 나름의 생각이 없진 않지만, 출협이라는 공적 단체의 대표로서 출판계의 뜻을 최대한 받들겠습니다. 특히 이 문제는 출판유통환경 개선위원회를 설치해 투명하게 풀겠습니다. 출판 유통의 현대화라는 당면 과제도 이 기구를 통해 해결해 나가겠습니다.

­출판계가 올해 맞딱뜨린 가장 큰 사업이 역시 프랑크푸르크도서전 주빈국 행사인 것 같습니다. ‘이대로 가면 실패하는 것 아니냐’ 하는 우려도 있고, 또 그런 우려가 이번 선거의 향배에 영향을 주었다는 평가도 있는데요.

=사정이 그렇게 어둡지 않습니다. 그동안 쌓아올린 우리의 국민 역량과 출판계 역량을 모은다면, 성공할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며칠 전 프랑크푸르트도서전의 고문 한 분이 내한했는데, 진행상황을 점검하면서 자기가 보기엔 한국이 준비를 잘하고 있는 편이라고 하더군요. 프랑크푸르트도서전 주빈국 행사는 우리 출판이 세계로 도약하는 데 발판 노릇을 할 수 있는 결정적인 행사입니다. 우리 출판계가 합심해서 먼저 노력하고 바깥에 협조를 요청할 생각입니다. 시간이 많지는 않지만 힘을 합치면 좋은 결과가 나올 것입니다.

글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사진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인터뷰 뒤안길

기틀세우기 단호함
이해조정엔 노련함

박맹호 회장과의 인터뷰는 쉽지 않았다. 바쁜 일정 때문에 인터뷰 장소도 바꾸고 시간도 옮겨야 했다. 인터뷰 중에도 그는 여기저기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았다. 새 회장과 면담하려는 출판인들을 마냥 기다리게 할 수 없어 중간중간 만나기도 했다. 일흔을 넘긴 몸으로 이렇게 빡빡한 일정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기도 했지만, 그는 두 시간이 넘는 인터뷰를 흐트러짐없이 너끈히 소화했다. 여러 출판 현안에 대해 정확하고 구체적인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치열한 선거가 막 끝난 상황이어서였는지 상대 쪽의 기분을 거스를 수도 있는 말을 삼가려고 무척 조심했다. 저마다 개성이 워낙 다르고 이해관계도 갈려 있는 출판계 현실에 필요한 노련한 조정자의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소신과 공약을 이야기하는 대목에서는 분명하고 단호한 목소리를 냈다. 출판의 위상을 높이고 출협의 기틀을 짜겠다는 뜻을 그는 여러 번 밝혔다. 언론이 출판문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일본과 비교해가며 설명하기도 했다. “일본은 출판의 질이 후퇴하고 있는데 반해 한국은 더디지만 꾸준히 전진해 왔습니다. 그게 언론이 출판에 보인 관심의 정도와 비례합니다. 일본 신문 지면에는 우리 신문처럼 집중적으로 책을 리뷰하고 소개해주는 넉넉하고 화려한 공간이 없습니다. 책과 신문은 활자 문화의 핵심입니다. 책 독자를 키우는 것이 신문 독자를 키우는 일이라는 생각으로 출판에 더 많은 관심을 보여주기를 바랍니다.” 고명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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