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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년 만에 개방되는 경복궁 4대문 중 유일하게 비공개로 남은 북문인 신무문.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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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년 만에 개방되는 경복궁 4대문 중 유일하게 비공개로 남은 북문인 신무문.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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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과 관람객들이 29일 45년 만에 일반에 개방된 경복궁 북문인 신무문과 집옥재를 관람하기 위해 신무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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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년만에 공개 관람객들이 29일 청와대를 등지고 45년 만에 일반에 개방된 경복궁 북문인 신무문 천장.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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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객들이 29일 45년 만에 일반에 개방된 경복궁 북문인 신무문과 집옥재를 관람하기 위해 신무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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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무문은 세종 15년 경복궁이 창건될 때 그 북문(北門)으로 들어섰다가, 성종 6년(1475) 예문관 대제학 서거정의 건의에 의해 신무문(神武門)이란 이름으로 편액됐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소실된 신무문은 고종 2년(1865) 9월 흥선대원군 이하응에 의해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신무문이란 이름으로 재등장했다. 상량문은 한성부 판윤 조득림이 썼고 현판은 영건도감 부제조 이현직 작품이다. 원래 북문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잘 이용하지 않는다. 신무문 또한 평상시는 닫아두었다가, 국왕이 후원에서 소요(逍遙)하거나 열무(閱武), 관농(觀農)을 위해 행차할 때 이용했다. 또한 신하들의 공훈을 기록해 놓은 회맹단(會盟壇)이 그 인근에 있었던 까닭에 국왕이 공신들의 충성을 다짐하는 모임인 회맹제에 참석할 때 사용되기도 했다.(중종 1년 1506년 10월19일) 중종실록 14년(1519) 조를 보면, 당시 기묘사화 때 남곤(南袞) 등이 밤에 신무문으로 들어가 변고를 아뢰어 조광조(趙光祖) 일파를 결국 사사케 했다. 이 사건을 조선왕조의 또 다른 정사 기록인 국조보감에서는 "북문으로 몰래 들어갔다"(북문잠입. 北門潛入)라고 말하고 있다. 영조 때는 숙종의 후궁이자 왕의 생모인 숙빈최씨를 모신 육상궁에 왕이 참배할때 터만 남은 신무문을 이용해 나갔다고 한다. 중건 뒤인 고종 33년(1896)에는 아관파천 때 고종이 신무문을 통해 러시아대사관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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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5ㆍ16 군사쿠데타 이후 굳게 닫혔던 경복궁 북문인 신무문(神武門)과 주변 집옥재(集玉齋) 일대가 45년만에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가운데 29일 집옥재 앞마당에서 학생들이 설명을 받고 있다. 집옥재는 고종황제가 경복궁 북측 건청궁(乾淸宮)에 거처할 때 외국사신들을 맞이하거나 서재로 사용하던 곳이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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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5ㆍ16 군사쿠데타 이후 굳게 닫혔던 경복궁 북문인 신무문(神武門)과 주변 집옥재(集玉齋) 일대가 45년만에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가운데 29일 집옥재. 집옥재는 고종황제가 경복궁 북측 건청궁(乾淸宮)에 거처할 때 외국사신들을 맞이하거나 서재로 사용하던 곳이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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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5ㆍ16 군사쿠데타 이후 굳게 닫혔던 경복궁 북문인 신무문(神武門)과 주변 집옥재(集玉齋) 일대가 45년만에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가운데 29일 집옥재. 집옥재는 고종황제가 경복궁 북측 건청궁(乾淸宮)에 거처할 때 외국사신들을 맞이하거나 서재로 사용하던 곳이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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