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세현/화가
|
나들목 옆 잔디밭 송편처럼 낙엽이 떨어지고
이마에 불켠 차들은 느릿느릿 내려간다
지난 태풍을 견뎌낸 달이 불끈 솟았다
그럴 것이었다. 인생이란 게 적은 빗물에도 골이 패이고 버석거리는 마사토처럼, 아무리 밑거름 두둑히 넣고 잡풀 뽑아 비료만큼이나 땀 흘려 하루해를 업어 키운다 하더라도 억세기가 청상과부로 평생을 늙어 온 시어머니보다 더 질긴데다가 벌레 또한 제 집이나 된 듯 무시로 드나들어 구멍 숭숭 뚫린 가을배추 신세라면 적금통장은 들먹일 필요도 없이 지폐보다는 떨렁거리는 동전 몇 닢으로 남을 때가 꼭 있는 법이다.
우리 셋은 그랬다. 금강 발원지인 첩첩산골에서 작은 연못만한 하늘을 보고 자란 우리들은 깨복쟁이 친구였다. 덜렁대는 불알 두 쪽이 전 재산이라면 영락없이 불알친구 맞았다. 하나는 두피를 파고들 것 같은 곱슬머리에 키가 작고 눈이 쭉 째지고 윗니 아랫니 합쳐 이가 다섯 개나 나간 삼류건달 녀석이었는데 관절염 때문에 초등학교를 2학년을 다니다 그만두고 세상 밑바닥을 2cm 짧은 한쪽 다리로 절뚝이며 기어왔고, 또 하나는 허우대는 멀쩡하되 그 허우대를 유지하려고 틈만 나면 먹을 것을 찾는, 배고프면 아무에게나 화를 내고 사고를 치는, 어쩌다 라면이라도 곱빼기로 먹고 나면 별이 어떻고 나무가 어떻고 이상한 말을 주절주절 늘어놓는 걸귀였는데 그도 겨우 의무교육 마치고 군대에서 불명예 제대한 일용직 잡부 출신이었으며, 나머지 하나는 색시처럼 말이 없는 고집불통이었지만 그래도 영장류에 가장 가까웠다. 같은 공장에서 사귄 비슷한 아가씨와 결혼해서 월세방을 얻어 밥은 굶지 않았으나 허구헌 날 동창생이자 웬수 덩어리인 두 녀석에게 시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규모가 큰 유리 공장에 다녔는데 재수 없이 추석 명절에 3교대 근무 조에 덜컥 걸리고 말았다. 유리공장은 일 년 삼백 예순 날 하고도 육칠일 동안 용광로를 끌 수가 없었다.
셋이 길을 가다보면 그 중 하나는 반드시 스승이기 마련이다. 결혼한 녀석은 허우대 멀쩡한 놈 사촌 형이기도 했다. 결혼 못 한 두 녀석이 경부 고속국도 기흥 나들목 근처 공장이란 공장을 다 떠돌며 일용직 잡부 노릇을 하거나 광케이블 긴급 공사장 땅 파기, 임시직 페이로다 기사, 골프장 농약 살포하기, 식품 창고 경비서기, 반도체 회사 증설하는 데 설비 보조를 비롯해 온갖 궂은 일로 목구녕에 풀칠을 하게 된 배경에는 성질 죽이고 측은지심으로 외상값 갚아 준 스승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추석 전 날, 고매리의 밤은 일찍 찾아왔다. 소름 끼치도록 반복해 온 밑바닥 일에 그 흔한 보너스도 받지 못하고 며칠째 굶고 있는 두 구신에게 구세주가 찾아왔다.
“나가자.”
회색 작업복에는 매캐한 배합실 파유리 냄새가 났다. 그의 손에는 동네 가게에서 산 소주 대두병과 새우깡이 들려 있었다. 우리는 외국 영화에서나 본 호화 전원주택이 드문드문 들어있는 별장촌을 지나 기흥 나들목 잔디밭으로 갔다. 자동차 소리가 시끄럽긴 했지만 마음껏 소리 지를 수도, 누구랄 것 없이 종주먹을 들이대며 울 수 있는 유일한 공원이 두 팔 벌려 맞아주었다. 송편처럼 낙엽이 떨어졌다. 지난 여름 그 오랜 장마와 태풍을 고스란히 견딘 달이 불끈 솟아올랐다. 아아, 저렇게 살 흐벅진 여자와 한 번만 잘 수 있다면…, 안주 없이 소주를 나발 불자 밑뿌랭이에서 부르르 진저리가 치받혀 올라왔다.
“절 하자.”
이마에 환하게 불 켠 차들이 느릿느릿 내려갔다. 우리는 두 번 반 굴을 파듯 땅 속 깊숙이 고개를 묻었다. 무쇠 솥뚜껑 엎어놓고 전 부치던 어머니 손처럼 갈색으로 물든 잔디는, 그 옛날 외양간에서 맡은 마른 풀 냄새였다. 흘리지 못한 우리들의 설익은 피 냄새였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가. 그새 강산이 두어 번 바뀌고 국민 소득 몇 만 달러, 세계 10위를 넘나드는 경제력, 휴대폰과 자동차와 컴퓨터가 넘치고 흘러 가히 풍요의 절정을 누리고 있는 듯한 오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는지, 쓴 소주 한 잔으로 망향의 한을 달래고 있는지…, 몸이 아픈 환자가 그렇고 그들을 돌보는 의사와 간호사들이 그렇고, 해외 상사 주재원, 원양 어선과 컨테이너 화물선에서 고생하는 선원들, 교도소 수감자, 똑같이 감옥 생활하는 교도관, 군인, 경찰, 대중교통 운전자, 항공기 승무원들, 갑작스럽게 쫓겨난 대추리 주민들, 소년 소녀 가장, 독거노인들, 장애인, 광주 나눔의 집 할머니들, 이산가족, 해외 동포, IMF 때 왕창 말아먹은 사람들, 신용 불량자들, 우루과이라운드와 FTA 때문에 파탄이 난 이 땅의 농민들, 지금 이 순간에도 정규직 전환을 위해 피땀 흘려 싸우고 있는 노동자들을 비롯해 치운 겨울을 몸 하나로 견딜 수밖에 없는 노숙자, 외국인 노동자, 기소 중지자와 지진·해일로 삶이 파탄이 난 남아시아 사람들, 아프간과 팔레스타인과 소말리아, 이라크를 비롯한 전쟁 피해자들을 생각하면, 아아, 이제는 밥도 굶지 않고, 빚도 갚아 한달음에 달려갈 수 있어도 이미 부모님 오래 전에 돌아가시고 형제들 뿔뿔이 흩어져, 반 쯤 무너진 빈집만이 비탈진 골짜기 때죽나무 아래 초라하게 내려앉은 무덤만이 지키고 있는 고향을 갈 수도 올 수도 없어 차례상 앞에 울먹이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그리고 이 많은 사람들 틈에 끼지도 못하는 성 매매 종사자들과 유흥업소 종업원들 또한 우리들과 똑같이 숨을 쉬는 영장류인 것이다. 차 밀린다고 짜증내지 말자. 단 한 순간이라도 이 분들을 떠올리며 마음 먼저 붉게 물들인다면 올 가을 단풍만큼 세상은 조금씩 고와지리라. 순해지리라. 빈속에 소주 대두병을 다 들이붓고 기흥 나들목에서 고매리 윤봉순 할머니 사글셋방까지 어떻게 걸어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소주가 되었든 막걸리가 되었든 동네 어귀 구멍가게에서 외상술을 더 들이부었을 것이다. 추석날 아침, 타는 갈증으로 눈곱 떼어내 정신 차려 보니 틈 벌어진 문 앞에 쌀 봉지 하나가 주막집 어귀의 어머니처럼 홀로 흔들리고 있었다. 고향 작은집에서 올라온 걸 형수 몰래 퍼온 것이 분명했다. 다람쥐처럼 석유곤로에 심지를 올리고 시커먼 냄비를 씻어 기도하듯 밥을 했다. 하얀 쌀밥에는 드문드문 돌이 섞여 있었다. 사촌 형은 오랫동안 밥맛을 보지 못한 식도를 위해 깊은 생각을 한 모양이다. 찬 물에 말아 돌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천천히 떠 넣었지만 울컥, 목부터 메어왔다. 유용주/ 시인·소설가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