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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을 전후해 만주국경지역에서 군수물자를 수송중인 일본 관동군이 열차 위에서 보초를 서고 있다. 정성길 UN평화박물관장 제공/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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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학의 세계적 권위자인 프라센짓 두아라 시카고대 교수는 ‘만주국’을 “제국주의의 새로운 형식을 대표하는 나라”로 평가했다. 그만큼 만주국은 ‘풍부한’ 역사적 텍스트다. 1930년대 동아시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만주국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만주국을 둘러싼 한·중·일의 역사인식은 크게 어긋나 있다. 우선 한국의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는 만주국에 대한 언급이 아예 없다. 일제 시기 만주에 이주한 한국인들을 기반으로 독립운동을 벌였다는 서술만 있다. 신주백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연구원은 “만주국이 역사교과서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배운 만주라는 공간이 가상공간이었음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중국과 일본도 ‘자국 중심의 기억’을 토대로 만주국을 다루고 있다. 중국의 초급중학교용 <중국역사>와 고급중학교용 <중국근대현대사>는 일본의 중국 침략의 한 과정으로 만주국 수립을 서술하고 있지만, 항일민족통일전선의 항쟁이 그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일본 역사교과서에는 만주국에 대한 일본인들의 ‘애증’이 드러난다. 중학교에서 널리 쓰이고 있는 동경서적판 <역사> 교과서는 관동군의 만주국 수립과 이에 대한 일본 내각의 반대, 국제연맹의 관동군 철군요구, 이에 대한 일본 정부의 거부 및 국제연맹 탈퇴 등을 ‘평가없이’ 나열하고 있다. 관동군의 ‘돌출적’인 행동으로 만주국이 탄생했다는 뉘앙스를 풍기면서도, 일본 정부가 이를 용인한 배경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다. 당연히 이 지역의 중국인·한국인 등의 저항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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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후소샤판 <새로운 역사교과서>는 “약체 정부에 대한 불만이 쌓였던 (일본) 국민은 관동군의 행동을 열렬히 지지했다” “만주국은 오족협화, 왕도낙토건설을 슬로건으로 일본의 중공업 진출 등에 의해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등의 서술을 통해 군부가 중심이 된 만주국 수립의 의미를 평가하고 있다. <한중일 함께 쓴 미래를 여는 역사>는 이런 어긋남의 통합을 시도했다. 3장 ‘침략전쟁과 민중의 피해’ 편에서 1절 전체를 만주국 관련 설명으로 채웠다. 만주국을 당대 한·중·일 관계를 설명하는 핵심으로 삼은 것이다. 1931년 9·18 사변-1932년 1·28 사변-1932년 3월9일 만주국 선포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상세히 적었다. “일본·만주족·한족·조선족·몽골족 등 다섯 민족이 ‘화합하는’ 국가를 수립했다고 선전했지만, 사실상 만주국은 일본 관동군이 장악한 괴뢰정권이었다. 모든 기구는 위에서 아래까지 완전히 일본인 관리들이 장악하고 있었다”는 게 <…미래를 여는 역사>의 판단이다. 일본 교과서에 등장하지 않는 관동군의 만행과 만주 지역 민중들의 저항을 상세히 서술하는 한편, 한국·중국 교과서에 없는 ‘조선족·한족 공동투쟁’도 소개했다. 아울러 만주국의 사회와 경제 체제를 상세히 소개해, ‘국가적 실체’를 분석했다.안수찬 기자 ahn@hani.co.kr
만주국 둘러싼 일-중 양국 시각
일본 “중국 근대화 촉진”
중국 “피땀 짜낸 수탈”
만주국은 개발의 유산인가, 수탈의 온상인가. 대다수 일본인은 만주국의 성립이 만주를 개발·발전시키는 계기가 됐다는 견해에 공감한다. 오늘날 중국 동북지역이 주요 공업지대가 된 것도 일본의 식민지 유산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본다. 만주국 시기에 건설된 각종 중공업 시설이 중국의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의 기초가 됐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중국은 만주국의 수립으로 이 지역이 부분적으로 개발되긴 했지만 그 개발은 ‘앙계취란(養鷄取卵·닭을 키워 계란을 취함)’, 즉 수탈을 위한 것일 뿐이었다는 시각을 유지하고 있다. 만주국 시기 광공업의 발전은 중국 인민의 피와 땀, 생명의 대가이므로 ‘개발’ 역시 “제국주의가 식민지에서 사람들을 부려먹고 약탈하는 역사적 과정에서 파생된 뜻하지 않은 결과”라는 것이다. 이 문제는 국내 학계의 ‘식민지 개발론(근대화론)’과 ‘식민지 수탈론’ 사이의 논쟁과도 관련이 있다. 1990년대 들어 본격화된 이 논쟁의 밑바탕에는 △해당 사회를 정체된 사회로 파악할 것인지 내재적으로 발전하던 사회로 볼 것인지 △해당 사회분석에 세계사적인 보편적 연구 방법론을 적용할 것인지 일국사적인 특수성에 연구 초점을 맞출 것인지 △‘식민지적 근대화’와 ‘근대화’ 개념을 구분할 것인지 등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만주국의 근대화 문제는 이 화두를 풀어갈 실마리다.
제국주의 싣고 달린 ‘만철’
박정권 ‘개발독재’의 모델
만주국을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이 1906년 설립된 ‘남만주철도주식회사’(약칭 만철)다. 일본의 ‘만주산업개발 5개년 계획’을 입안·추진하는데 중심역할을 한 것이 바로 만철 조사부였다. 만철조사부는 만주의 철광석·석탄 등을 활용해 철강·석유화학 산업 등을 일으키고 철도·도로망의 확충을 통해 자동차·수송·기계·항공기 산업까지 육성한다는 원대한 계획을 입안했다. 만철의 배후에는 관동군이 있었다. 관동군은 만주국 관료와 만철조사부를 손발처럼 부리면서 ‘만주산업개발 5개년계획’을 추진했다. 초창기 만주국의 경제부문은 관동군의 통제하에 만철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다. 만주국의 중요한 정책의 입안이나 집행은 관동군사령관의 재가를 받아야만 했다. 만주국 황제는 단지 관동군이 결정한 사항을 추인하는 존재에 불과했다. 관동군의 폭력과 만철의 개발이 만나는 ‘개발독재’의 원형이 바로 만주국에 있다는 평가도 있다. 만철의 운영은 철저하게 일본인 중심으로 이뤄졌다. 만철 종업원 가운데 육체노동자는 대부분 중국인과 조선인이었고, 기획·운영·기술·개발 부문에는 일본인이 집중적으로 배치됐다. 만철의 주요 자금원은 철도·광산·탄광 분야의 노동자는 대부분 중국인과 조선인이었다. 만철은 중국인과 조선인의 피와 희생을 동력으로 삼은 ‘식민지의 수탈자’인 동시에 ‘식민지 개발의 장본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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