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3.09 16:11
수정 : 2005.03.09 16:11
■만주국 우리에게 어떤 곳?
한국인에게 만주국은 어떤 의미인가. 우선 만주국은 뒷날 남북한의 권력을 잉태시킨 공간이다. 김일성·김책·최용건 등 북쪽 지도자들과 박정희·정일권·최규하 등 남쪽 지도자들은 모두 일제가 지배한 만주국의 질서에 저항 또는 적응하면서 성장했다. 만주국은 당시 수많은 조선인에게 ‘기회와 고난의 무대’였다. 특히 일본이 막대한 산업투자를 했던 만주국은 당대 조선인 엘리트에게 사회적·경제적·정치적 성공의 공간이었다. 이 기억은 지금까지도 ‘국가주도형 개발 모델’의 원형으로 남아있다.
학계에서는 만주국이 ‘일본의 괴뢰국’이었다는 점에 대해 별 이견이 없다. 일본인이 실질적 권한을 장악하고 있었고, 일본의 이익실현을 최우선의 과제로 삼다가 일본의 패망과 더불어 붕괴됐다는 점에서 그렇다.
다만 만주국이 ‘이상향’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던 점은 주목할만하다. 당시 주변 여러 민족의 가난한 이민자들에게 만주국은 새로운 ‘삶의 보금자리’였다. 망명객들에게는 암울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독립운동 기지’였다. 박해를 피해 도망쳐온 유대인이나 이슬람인(回族), 볼셰비키 혁명을 피하려는 백계(白系) 러시아인에게는 ‘구원의 공간’이었다. 일본인조차 만주국을 본토의 폐쇄된 공간으로부터 벗어날 도피처로 여겼다. 만주국이 ‘다민족으로 구성된 대안적 국가체제’로 선전됐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수많은 중국인 노동자들은 만주국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 지역을 끝없이 유동했다. 10월혁명 당시 20여만명에 달했던 재만 러시아인 역시 민족차별때문에 인구수가 급격히 감소했다. 만주국으로 이주한 일본인 역시 본국에서 차별을 받고 있던 부락민 출신이 많았다. 다른 재만 일본인들도 본토에서 ‘만주 낭인(浪人)’으로 불리며 차별의 대상이 됐다.
재만 조선인들도 다르지 않았다. 일본은 조선인을 형식적으로만 ‘(일본인 다음의) 2등 공민’으로 취급했다. 실제로는 중국인의 반발을 의식해 조선인의 지위를 중국인보다 위에 두지 않았다. 이때문에 만주의 조선인 가운데는 도박·아편밀매·매춘·밀수 등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의 생활여건은 중국인보다 열악했다. 중국인들도 “일본의 앞잡이”라는 경멸적 의미를 담아 조선인을 ‘2등 공민’이라 불렀다.
만주국은 항일과 친일이 뒤얽힌 공간 또는 고난과 기회를 선택적으로 제공한 공간이다. 그러나 그 만주국은 지금 한국인들의 뇌리에서 잊혀졌다. 중국과 일본은 ‘선택적’으로 이 공간을 불러오고 있다. 한·중·일이 함께 들여다보는 만주국을 통해 우리는 1930년대 동아시아의 실체를 보다 정확히 알 수 있다. 거기에는 오늘날 한국의 ‘원형질’도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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