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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3.09 16:35 수정 : 2005.03.09 16:35



신문, 방송, 잡지, 인터넷을 비롯한 각종 대중매체들은 늘 사건들을 다룬다. 사건들은 사람들의 관심을 일깨우고 장안을 떠들썩하게 한다. 사건들은 갑작스럽게 삶의 표면으로 돌발해 나타나며, 때문에 사건이라는 개념에는 예기치 않은 일이라는 뉘앙스가 붙어 있다. 일본 관료들의 불쑥 내뱉는 망언들, 숱한 자연재해들, 지하철 등에서의 사고들을 비롯해 각종 사건들은 갑작스럽게 돌출한다.

‘예기치 않은’이라는 말은 사건 발생의 시간과 공간이 우발적이라는 말이다. 사건에는 늘 우발성이라는 양상이 결부되어 있다. 때문에 사건을 예측하고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라면 몰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사건이란 자신들의 의지와 관계없이 돌발하는 무엇이다. 때문에 사건이 발생하는 시공간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던 시공간이다. 사람들이 직접 경험을 통해서가 아니라 매체들을 통해서 사건을 접하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매체들은 세상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을 선택해서 일정한 시각으로 구성해 대중에게 전달한다. 곧 우리가 매체에서 보는 사건들이 반드시 중요한 사건들인 것은 아니며, 차라리 매체 종사자들에게 관심이 가는 사건들이라 해야 하는 것이다. 매체들은 ‘대중’을 위한다고 하지만, 사실상 그 대중은 매체가 만들어내는 대중인 것이다. 텔레비전이 대중화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텔레비전화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자신이 직접 경험한 사건이 아닌 한 세상의 사건들을 매체들의 취사선택을 통해 주입받게 되는 셈이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매체들을 통해서 알게 되는 사건들은 각 매체의 눈길에 의해 이미 해석된 사건이라는 점이다. 사건의 현장에서 그것을 체험한 사람이 아닌 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특정 매체에 의해 해석된 사건을 만나게 된다. 예컨대 신문의 기사들이 ‘사실’이나 ‘진실’이 아니라 각 신문의 정치적 색깔에 의해 채색된 해석이라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설사 기사 내용이 모두 사실들이나 진실들로 채워져 있다 해도 그것들을 취사선택하고 배열하는 방식 자체가 이미 해석인 것이다. 요컨대 사건에 대한 순수한 시각이나 인식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하겠다.

따라서 정치적 사건만이 정치적인 것은 아니다. 비정치적 사건들도 정치화된다. 사건들을 바라보는 정치적 입장에 따라 비정치적 사건들도 정치적 색깔로 채색되는 것이다. 그런 채색은 눈에 잘 띄지 않고 그래서 잘 인지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비가시적 틀을 읽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언론매체가 죽이고 살리고

사건은 어떻게 정치화되는가? 더 근본적으로, 사건이란 무엇이고 또 어떻게 의미를 가지게 되는가? 사건의 정치적 의미란 무엇인가?

사건의 발생이란 세계 내에서의 차이의 도래이다. 사건이 발생함으로써 이 세계에는 크고 작은 차이들이 도래하게 된다. 더 정확히 말해 사건은 세계의 표면에서 발생한다. 세계의 표면, 곧 세상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표면으로, 현실세계로 드러나지 않은 사건들은 인지되지 않는다. 우리는 지구의 내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른다. 자기 몸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설사 세계의 심층부로 들어가 사건들을 채취하는 경우라 해도, 그 때의 사건들은 현미경이나 망원경, 아니면 그 어떤 기계들이든 일정한 장치들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며, 그런 한에서 그것들 또한 장치들을 매개해 세계의 표면으로 드러나는 사건들인 것이다. 요컨대 사건이란 그 사건을 확인하는 인식주체를 이미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차이의 크기가 어느 정도에 이르면 그것이 ‘사건’이 되는가 하는 것이다. ‘사건’이라는 말에는 어떤 큰 차이의 도래라는 함축이 들어간다. 그래서 사건들에는 항상 날짜들이 붙어 있고, 아주 큰 사건이 발생하면 역사는 그 사건 이전과 이후로 나뉘곤 한다. 그래서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사건의 이전과 이후, 태평양 전쟁의 이전과 이후, 1987년 6월 항쟁 이전과 이후 등이 나뉜다. 또 사건들은 장소들과도 관련된다. 예컨대 한국사에서 ‘부마’, ‘제주’, ‘광주’ … 같은 도시들, ‘청석골’, ‘벌교’ … 같은 마을들에는 일정한 사건들이 각인되어 있다. 사건이란 큰 차이의 도래이고, 그 차이들은 시간과 공간을 변별시키면서 역사에 각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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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차이가 도대체 어느 정도의 문턱을 넘어서야 사건이 되는지는 불분명하다. 근원적으로 보면, 존재론적으로 보면, 바람에 흔들리는 깃발, 찰랑거리는 물결의 운동, 누군가의 기침 등등도 사건들이다. 다시 말해 우주의 생성 자체가 사건들인 것이다.

정치적 태도 따라 구성·채색

그러나 분명 생성 개념과 사건 개념은 뉘앙스가 다르다. 생성에는 ‘흐름’이라는 연속성의 뉘앙스가 강하고, 사건에는 ‘솟아오름’이라는 불연속의 뉘앙스가 강하다. 생성의 시간은 베르그송적인 ‘지속’이고 사건의 시간은 바슐라르적인 ‘순간’이다. 하나는 수평으로 흐르는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수직으로 솟아오르는 시간이다. 니체, 베르그송, 화이트헤드, 들뢰즈를 비롯한 현대 사상의 거장들이 시간의 본성을 성찰했거니와, 생성의 시간과 사건의 시간에는 이렇게 분명한 뉘앙스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차이가 얼마만큼 커야 불연속이 도래하는 것일까? 어디까지가 생성이고 어디에서부터가 사건인가? 차이가 어떤 문턱을 넘어서야 사건이 되는 것일까?

사실 이 문턱은 상대적이다. 광화문 한복판에서 두 사람이 주먹질을 해댄다면, 그것은 하나의 ‘사건’으로서 주변 사람들의 인구에 회자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 날 광화문에서 폭탄 테러가 벌어졌다면, 두 사람의 주먹다툼은 그 폭탄 테러의 배경으로 내려 가버린다. 광화문에서 한 정치인의 연설이 있었다면 그것은 하나의 사건으로서 사람들의 이야기 대상이 되겠지만, 만일 그날 어떤 정치인의 암살이 있었다면, 그 연설은 다른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암살 사건의 배경으로 물러가버릴 것이다.

요컨대 하나의 사건이란 항상 그것보다 작은 사건들을 배경으로 솟아오른다. 거꾸로 말해 상대적으로 작은 사건들은 그것들보다 큰 사건의 배경으로 물러간다. 곧 물결의 살랑거림, 바람 … 등의 극히 작은 사건들로부터 혁명이나 테러, 자연재해 등의 극히 큰 사건에 이르기까지 사건들이 도래시키는 차이들은 무수히 다양한 층차(層差)들을 보여주며, 그 상대적 층차들에 입각해 어떤 것은 사건으로서 솟아오르고 다른 것들은 그 사건의 배경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은 생성이거니와 ‘더 큰’ 생성이 사건이 된다. 그리고 ‘더 크다’는 것은 사건들의 상대적 크기, 다시 말해 그것들이 차이를 도래시키는 정도가 얼마나 크냐에 따라 성립하는 것이다. 모든 생성은 다 사건들이지만, 그때그때 맥락에 따라 상대적으로 보다 큰 불연속을 도래시키는 것이 사건이 된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더 크다’라든가, 다른 사건들을 배경으로 밀어내고 솟아오른다는 것은 무엇을 기준으로 한 것일까? 테러 사건이 주먹다툼 사건을 배경으로 밀어내고 솟아오르는 것은 무엇을 기준으로 하는 것일까? 더 많은 물건들이 깨진 것이 기준인가? 아니면 더 근본적인 기준이 있을까?

하나의 생성이 사건으로서 마름질되는, 다시 말해 ‘하나의 사건’으로서 끊어 이해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의미에 있다. 곧 생성은 일정한 의미를 가질 때 사건으로서 마름질된다. 그렇다면 의미는 어떻게 발생하는가?

우리는 자칫 의미라는 것이 있어서, 마치 어떤 사물이 땅에 묻혀 있다가 발견되듯이 발견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방에 피아노가 있듯이 말에는 의미가 들어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의미는 구성되는 것이지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말이 있어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말이 의미를 구성하는 것이다. 어떤 생성이 사건이 된다는 것은 그것이 언어를 통해 마름질된다는 것을 뜻한다. 사건이 있어 그것이 언어화되는 것이 아니라 언어화될 때 비로소 하나의 사건이 뚜렷하게 마름질되는 것이다.

사건과 사건 이어 의미 부여

사건이란 단독으로는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않는다. 광화문에서 폭탄이 터졌다 해도, 그것이 큰 사건이 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사고’가 아니라 ‘테러 사건’이라고 부름으로써이다. 그리고 이렇게 특정한 사건이 마름질되는 것은 그 사건이 다른 사건들과 이어짐으로써이다. 이라크 전쟁을 비롯한 여러 다양한 사건들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어떤 폭탄 터짐이 ‘테러 사건’으로서 마름질되지 않는 것이다.

%%990003%%결국 의미란 사건들을 이음으로써, 달리 말해 계열화함으로써 성립한다. 우리는 앞에서 매체들이 사건들을 취사선택하고 해석해 전달한다고 했다. 이제 이 사실을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취사선택한다는 것은 세계의 숱한 생성에서 사건들을 마름질한다는 것이고, 해석한다는 것은 하나의 사건을 어떤 다른 사건들과 계열화해 의미를 만들어냄을 뜻하는 것이다. 이렇게 사건이란 순수하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건의 구성은 늘 정치적 입장에 의해 채색된다. 이렇게 사건은 정치적인 것이 된다.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공동대표 soyowu@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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