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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4.04 16:55 수정 : 2005.04.04 16:55



달동네 좁은 방 여신의 신전, 나는 사제

오래된 영화를 기억하는 건 길게 객차를 매달고 한밤중을 달리는 기차를 바라보는 것과 비슷하다. 오래된 기억들이 모두 그러하듯, 오래된 영화의 기억도 작게 분절되어 있다. 시퀀스들은 사라지고 스틸사진들만 느슨하게 연결되어 흘러간다. 캄캄한 밤을 달리는 긴 객차마다 차창에 한 여배우의 얼굴이 떠 있다. 나스타샤 킨스키. 내가 사랑했던 단 한 명의 여배우라고 조금도 주저 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배우. 그녀가 내게 손짓한다. 멀리서 바라보지만 말고 이 기차에 올라타세요. 나는 주저하지 않고 기차에 올라탄다.

대학 1학년 시절. 1979년. 동숭동 낙산자락 달동네의 작고 허술한 방. 앉은뱅이 책상, 철제 책꽂이, 아버지가 대학 입학 선물로 사주신 전축. 둘이 누우면 꽉 차는 작은 방이었다. 앉은뱅이 책상 위에 언제나 펼쳐진 채로 놓여진 책이 있다. <테스>. 300원짜리 삼중당 문고 한 권을 사면서도 새가슴이 되어야 했던 시절, 그 크라운 판형에 올 컬러 책을 사기 위해 내가 써야 했던 돈은 얼마였을까. 영화사들이 무슨 유행처럼 출판사를 차리던 시절이었다. 영화 <테스>를 수입한 회사에선 영화의 중요한 장면들을 거의 고스란히 담아 소설 테스를 펴냈다. 그리고 그 덕에 내게 테스는 토머스 하디의 테스가 아니라 나스타샤 킨스키의 테스가 되었다. 심지어 로만 폴란스키의 테스도 아니고, 나스타샤 킨스키의 테스다.

문학 청년·군인·넥타이맨에게
기억속 차창안 그는 말을 했다

겁에 질린 커다란 눈, 하얀 이가 보일 듯 말 듯 살짝 열린 입술, 그 입술 앞에 내밀어진 붉은 딸기. 바람둥이 알렉스가 순진한 시골처녀 테스를 유혹하는 장면이다. 사진은 달동네의 좁아터진 내 방을 여신의 신전으로 바꿔놓았다. 나는 여신을 모시는 젊은 사제였다. 날마다 여신에게 싱싱한 딸기를 바치는, 아니, 스스로 그 딸기가 되어 여신의 입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욕망에 몸을 떠는, 미친 사제였다. 오! 그 책을 빌려간 뒤 돌려주지 않은,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 그 누군가에게 저주 있으라. 그는 내 젊은 날의 가장 은밀한, 그러나 순결했던, 첫사랑의 욕망을 도둑질해 갔으니.

기억은 대구 중심가에 있던 어느 극장에 멈춘다. 푸른 제복에 갇혀 있던 스포츠 머리 군인 ‘아저씨’가 혼자 극장에 앉아 있다. 생리적 이유 때문에 공포영화를 거부하던 그 군인 아저씨가 외출을 나와 혼자서 유혈 낭자한 그 영화를 상영하던 극장으로 들어간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의 여신 나스타샤 킨스키가 나왔기 때문에. <캣 피플>. 1982년, 전두환 장군의 전성시절, 시대는 공포영화보다 더 참혹했고, 시를 일용할 양식으로 삼던 문학청년에게 그 단순명쾌한 명령어의 세계 군대는 지옥이었다. 흑표범이 된 여신이 군인 아저씨에게 명령한다. 공포를 이겨내거라. 눈을 뜨고 나를 보라. 아름다움은 공포 속에서 가장 빛나는 법이다!


기억은 다시 기차에 올라타 몇 년쯤의 시간을 달려간다. 지금은 사라진 인사동 입구의 어느 작은 소극장. 객석은 텅 비어 있다. 넥타이를 맨 젊은 샐러리맨이 의자에 파묻혀 있다. 그는 울고 있다. 영화가 서러워서, 시인이 되지 못하고 월급쟁이가 되어 버린 자신의 길지 않은 인생이 서러워서. <파리 텍사스>. 여신은 유리벽에 갇혀 있다. 하나씩 옷을 벗으며 여신이 말한다. 울지 말아요, 내 사랑. 당신이 찾아온 파리는 프랑스가 아니라 텍사스 황무지의 파리였어요. 외롭고 쓸쓸하고 서러운 황무지, 그게 인생이랍니다. 당신이 걸어가야 할 길은 아직 멀어요. 눈물을 닦고 또 걸어가세요.

기억이 올라탄 기차는 작은 간이역들마다 멈춰선다. <달빛 그림자>, <마리아스 러버>, <사랑의 아픔>, <막달레나>, <라 비온다>… 그리고 종착역이다. <원나잇 스탠드>. 기억의 기차는 나를 내려놓고 떠나간다. 떠나가는 기차의 창에서 이제 나이든 여신이 손을 흔든다. 여신처럼 나이든 나는 그녀에게 고개 숙여 절한다. 감사합니다, 나의 여신이여. 당신이 있어 내 삶은 기억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조병준/여행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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