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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아·태평양 전쟁 발발 직후, 일제 관리와 지역 유지 등이 조선에서 강제로 수집한 놋그릇 등을 모아놓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물자에 대한 강제수탈은 이후 인력강제동원으로 이어졌고, 조선총독부를 중심으로 한 일제 국가기구와 지역 친일 세력들은 최일선에서 이를 지휘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⑦ 강제징용 가해·피해 증언 동시에…침략국 민중 고난도
한·중 교과서, 약탈 기술하되 본질 설명 부족
일본 “불가피한 동원” 강조 강제성 논지 흐려 ‘강제동원’은 일제가 국가총동원법을 근거로 한국인·중국인들을 노동자나 군대 요원 등으로 강제연행한 사실을 가리키는 말이다. 공동교과서 <미래를 여는 역사> 집필위원인 이인석 경기여고 교사는 그 배경으로 일제의 침략전쟁과 전시동원체제를 지적한다. “아시아·태평양 전쟁이 중국침략, 말레이 반도 및 하와이 공격 등으로 확대돼 군사비가 급증하면서 자국내 인적·물적 동원의 한계에 다다른 일제가 선택한 전시체제”가 강제동원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1931년 국가 예산의 31%를 차지한 일제의 군사비는 1937년 69%, 1944년 85%로 늘었다. 1931년 31만명이었던 병사는 1945년 719만명에 이르렀다. 따라서 강제동원은 일제 침략이 동아시아에 남긴 상처를 설명할 핵심이다. ‘침략의 역사’를 극복하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할 관문인 셈이다. 그러나 세나라 중학교 역사교과서의 서술은 ‘총체적 부실’로 요약된다. 가해자인 일본은 물론 피해자인 한국·중국조차도 강제동원의 실태를 입체적·종합적으로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한국 중학생용 <국사>는 ‘일제의 경제수탈’ 편에서 토지·산업·식량수탈 등을 5쪽에 걸쳐 서술한다. 중국 초급중학생용 <중국역사>도 ‘일본 침략자의 포악한 통치’ 편에서 비슷한 내용을 4쪽에 나눠 적었다. 서술분량으로만 보면 두 나라 모두 적지 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만, 일제 약탈의 배경인 전시동원체제 전반에 대한 설명이 없고, 자국이 아닌 다른 나라 피해에 대한 서술도 없어 강제동원의 실체를 이해하기 힘들다. 일본 교과서는 더 심각하다. 도쿄서적판 <일본사>는 전시동원체제에 대해 “총력전이어서 모든 일본국민이 동원됐다”고 설명한 뒤, “일본과 독일은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외국인을 강제적으로 연행했고 … 희생자가 나왔다”고 적었다. 전시동원의 주체로 난데없이 독일이 등장하고, 일본인과 외국인의 피해를 같은 종류로 다룬 것이다. 후소사판 교과서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은 … 국민의 모든 것을 행하는 총력전 시대가 됐다. 일본도 … 총동원체제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게 됐다”며 은근히 전시 강제동원의 불가피성을 강조하고 있다. <미래를 여는 역사>는 교과서 전체를 통털어 강제동원의 배경과 실상, 피해를 종합적으로 서술하는 데 큰 노력을 기울였다. ‘침략전쟁과 민중의 피해’를 다룬 제3장에서 2~5절에 걸쳐 세나라 민중의 피해를 적었다. 강제동원 관련 부분만 20여쪽이 넘는다. 우선 일본 청년장교들의 쿠데타를 이용한 군부세력이 정치를 장악하고 총력전체제 아래 일본 정치를 장악한 ‘배경’을 상술했다. 정당해산·노동조합해산·생필품 배급제 실시·언론 출판 사전 검열 등 일본식 파시즘 체제의 성립도 적었다. 전시동원체제의 본질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돕는 대목이다. 이어 한국과 중국에서 벌어진 경제수탈과 인력동원, 일본군 위안부 등 피해 실태를 상세히 적었다. 피해자 및 가해자들의 생생한 증언도 실었다. 전시동원체제에 따른 일본 민중들의 고통도 서술했다. 제국주의적 침략이 피침략국은 물론 침략국 내부의 민중들에게도 크나큰 피해와 압박을 준다는 점을 드러낸 것이다. 다만 당시 일본 민중들이 동원체제 아래서 ‘자발적 협력’도 아끼지 않았음을 적었다. 강제동원과 자발적 협력의 차별성을 구분할 수 있는 눈을 길러주려는 뜻이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침략국도 피침략국도 쓰라린 생채기 일 국가총동원법 ‘야만행위’ 정당화
조선 병참기지화 수백만명 강제노역
일 사죄·배상 동아시아 우호 첫걸음 %%990002%%좋은 전쟁은 없다. 사람들에게 엄청난 피해와 고통을 주기 때문이다. 아시아·태평양 전쟁에서 동아시아 세나라 사람들은 그야말로 엄청난 피해와 고통을 당했다.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당한 한국인·중국인은 물론 일본인들도 큰 고통을 당했다. 중국 침략 이후 정상적 국가 운영으로 전쟁을 수행할 수 없게 된 일본은 1937년부터 국가 체제를 전시체제로 재편했다. 1938년 4월 공포된 ‘국가총동원법’은 의회 승인없이 천황의 명령으로 ‘국가의 모든 힘을 가장 효과적으로 발휘할 수 있도록 인적·물적 자원을 통제 운용한다’고 규정했다.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강제동원을 정당화하는 도구를 마련한 셈이다. 일본은 한국을 중국 침략의 병참기지로 만드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1937년 당시 조선 총독 미나미는 “앞으로 어떤 큰 사태에 맞닥뜨렸을 때 … 조선의 힘만으로 이것을 보충할 수 있을 정도로 군수공업 육성 등 조선 산업 분야를 다각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일본은 1938년 5월10일 국가총동원법을 한국에 확대해 전시체제에 편입시켰다. 한국은 일본 본토보다 훨씬 빠르고 효과적으로 전시체제로 재편됐다. 조선총독부는 강력한 행정력과 경찰력으로 무장한 식민지 통치체제와 전국적 조직망을 갖춘 관변 조직들을 겸비하고 있었다. 특히 조선 총독은 천황을 제외한 누구의 간섭없이 조선을 통치할 권력을 갖고 있었다. 일본처럼 관련법을 제·개정하는 번거로움도 없었다. 일본의 각종 통계를 분석하면 강제동원된 한국인은 794만여명으로 추산된다. 대부분 1938년 국가총동원법이 공포된 뒤 동원됐지만, 일본군 위안부처럼 1931년 일본의 만주 침략 이후부터 동원된 경우도 있다. 이들은 대부분 탄광·비행장·항만·터널·군수공장 등 위험한 작업장에 배치돼 힘든 노동에 종사했다. 이들의 삶은 비참했다.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임금도 받지 못한 채, 민족적 차별을 견디며 죽음의 공포에 떨었다.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이에 대한 보상은 없었다. 그저 살아 돌아가는 것만이 유일한 희망이자 목표였다. 동아시아 학생들은 왜 이처럼 기억하기조차 끔찍한 ‘사실’을 역사교과서를 통해 ‘기억’해야 하는가. 왜 일본에게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가. 수업 중 어떤 학생이 질문했다. 해방된 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일본이 사죄를 하는 것이 왜 중요하냐고. 사죄를 한다고 달라지는 것이 없지 않느냐고. 필자는 그 학생에게 사죄했을 때와 그렇지 않았을 때 똑같은 역사를 되풀이 할 가능성이 어느 쪽이 클 것인지 생각해 보라고 답했다. 강제동원에 대한 사죄요구는 결코 일본을 굴복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사죄는 힘이 있다고 다른 나라를 침략하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이는 중국과 한국도 똑같은 일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연결된다. 그래서 강제동원의 실상을 기억해내고 이를 사죄하는 것은 동아시아가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는 전제 조건이다. 지금 세 나라가 공동 역사교과서를 펴내는 것도 바로 이때문이지 않을까. 이인석 경기여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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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부조직까지 ‘촘촘’ ‘국민총력’ 자발성 위장
일제는 한국에서 1938년부터 해마다 상당한 예산을 들여 ‘노무자원조사’를 실시해 ‘동원가능한’ 숫자를 파악했다. 1941년 11월 ‘청장년국민등록제’를 시행하고 뒤이어 ‘국민근로협력령’도 공포했다. 같은해 12월에는 다시 ‘노무조정령’을 시행했고 이듬해 2월부터 노무동원을 시작했다.
일제는 동원을 자발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1940년 10월부터 ‘국민총력운동’을 펼쳤다. 조선총독부에서 각 마을에 이르기까지 ‘총동원연맹’이 만들어졌다. 총독과 정무총감은 국민총력운동의 중앙 기구인 조선 연맹의 총재와 부총재를 맡았고, 지방행정의 수장이 지방 연맹의 장을 맡았다. 각 마을의 부락연맹에는 10개 가구를 하나로 묶은 애국반이 설치됐다. 총독의 지시는 조선연맹-도연맹-부·군연맹-읍·민연맹-부락연맹-애국반-대표애국반원(호대표)-애국반원(개인)으로 빠르게 전달됐다.
1943년 당시 한반도의 전국 가구수는 487만8901호였다. 당시 국민총동원연맹에 소속된 대표 애국 반원은 457만9162명이었다. 전국 가구 가운데 92.8%가 총동원연맹에 가입한 것이다. 촘촘히 짜여진 각 조직들은 물자는 물론 인적 자원을 통제·동원하는 기능을 했다.
이인석
역사노트 ● 하나오카 사전 중국노동자 1천명 집단탈주 일제 혹독한 착취 저항투쟁 ● 도나리구미 일본내 10호단위 동원체제 생필품 받으려 협력 불가피 국내 노동력 동원의 한계를 드러낸 일본은 1941년 이후 중국 점령지역에서 전면적인 ‘강제노동제’를 실시했다. 특히 중국 동북지역에서는 대규모 군사시설 건설을 위해 만주국을 앞세워 중국인들을 ‘조달’했다. 1941년 이후에는 그 수가 해마다 100만명에 이르렀다. 체포한 항일 군인이나 일반인도 동북지역으로 끌고와 고된 노역을 시켰다. 1943년부터는 강제로 징발한 중국 노동자를 일본 본토와 조선, 심지어 남태평양까지 보내 노역을 시켰다. 이 가운데 일본으로 끌려간 중국 노동자는 4만여명으로, 35개 기업 135개 작업장에 분산배치됐다. 이 가운데 6800명이 넘는 중국 노동자들이 강도 높은 노동과 열악한 생활환경으로 사망했다. ‘하나오까 사건’은 야만적 착취를 벗어나려는 중국 노동자 저항투쟁의 대표적 사례다. 1944년 7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중국 전쟁포로와 민중 등 약 1000여명이 일본 아키다현 하나오까로 끌려갔다. 고된 노동에 시달리던 이들은 1945년 6월30일 저녁, 집단 탈출했다가 체포·진압 당했다. 이때 418명의 중국 노동자가 사망했다. 전쟁이 끝나자 이들을 감시했던 경찰 2명 등이 포로살해·학대죄로 사형 등을 언도받았지만 나중에 모두 석방됐다. ‘도나리구미’(隣組)는 일본 내부를 향한 전시동원체제다. 경찰·구청 관리를 바탕으로 약 10호의 가구를 하나로 묶어 전국적으로 130만여개의 도나리구미가 만들어졌다. 이들은 출정병사 배웅·국방헌금·금속회수·근로봉사 등에 동원됐다. 생필품의 배급이 도나리구미를 통해 이뤄졌기 때문에, 일본 국민들은 이에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인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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