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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 직원들이 8일 오후 서울 용산구 백범기념관에서 ‘일제 침략사 특강’을 받기 전 백범 김구의 묘소를 찾아 참배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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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교과서 왜곡과 독도 문제로 한·일 간의 긴장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일본 문부성의 교과서 검정결과 발표를 계기로 <한겨레>는 한·일 지식인들의 ‘미래 제언’을 앞으로 세차례에 걸쳐 긴급 연재한다. 한·일 갈등과 대립의 실체를 드러내고, 용서와 화해, 공존의 미래를 위한 주문과 제언을 두 나라 모두에게 전하려는 뜻이다. 글쓴이들의 아픈 지적은 때로는 자국 내부를, 때로는 상대 나라를 향할 것이다. 이들의 글이 ‘한·일 우정의 해’ 2005년을 더럽히는 사람들을 향한 매서운 회초리이자, 그 반대편에서 평화를 꿈꾸는 이들을 위한 든든한 지팡이가 되기를 기대한다.
두나라 ‘시민사회 연대’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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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은홍/ 성공회대 아시아엔지오정보센터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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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동북아는 공멸의 문턱으로 들어서고 말 것인가. 한·일간 평화공존의 해법은 없는가. 이런 우려를 피할 수 없음에도, 최근 탄력을 받기 시작한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3(한·중·일)’을 기축으로 하는 동아시아 공동체 논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아세안 국가 간에는 국경을 넘는 보편적 의미의 인권의제를 논의하면서 기존의 ‘불간섭주의’를 넘어서려는 움직임이 있다. 이런 ‘간섭’은 민족국가 간 단위의 폐쇄성과 역사·문화적 특수성을 전제로 ‘인권의 상대성’을 천명했던 예전 아세안 국가들과는 분명 다른 모습이다. 변화는 아세안 내에서 비교적 빠른 민주화를 경험하고 있는 회원국들에 의해 촉발됐다. 물론 이들 회원국들의 민주화는 시민사회 성장의 결과이자 원인이다.
그렇다면 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민주주의를 경험한 일본은 이런 ‘수준’의 아시아 국가들을 이끌 도덕적 지도력을 보여주는 강대국으로 성장했는가? 이제는 일본보다 활력있는 시민사회가 있다고 자부하는 한국은 어떠한가?
일본은 국가주도의 고성장이라는 면에서는 동아시아에서 ‘모범’을 보였지만 군국주의 유산을 청산하는 데 실패하면서 도덕적 지도력을 스스로 포기했다. 한국 역시 국가주도의 고성장을 경험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특히 ‘박정희 모델’로 불리는 개발독재 시기의 고성장은 이른바 ‘장개석-장경국 모델’과 함께 개도국들로부터 적지 않은 관심을 받았다. 일본에서 시작돼 한국, 대만으로 이어진 국가주도의 고성장 모델은 동남아 국가들에게도 관심사가 됐다. 그리고 고성장이 동북아로부터 동남아로 전이되기 시작하였다.
국가주도 고성장 폐해 비슷
이 와중에 일부 동아시아 국가들은 성장을 위해서는 인권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다는, 이른바 ‘무자비한 선택(cruel choice)’을 ‘아시아적 가치’로 번역해냈다. 결과적으로 이 ‘번역’에 한국 역시 기여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또한 이런 배경 위에서 한때나마 개발독재와 인권억압이 ‘동아시아’를 상징하게 됐다.
그러나 한국 시민사회는 개발독재라는 긴 터널을 지나 국가 안에 갇혀 있던 인권을 해방하기 시작했다. 국가테러와 관련된 과거청산도 시작됐다. 반면 일본 시민사회는 국가주의의 파고 앞에서 대단히 힘들어 하는 듯 하다. 일본 시민사회를 향한 한국 시민사회의 연대의 필요성이 여기에 있다. 국가 주도 고성장 모델의 폐해를 시민사회의 ‘규율’로 한발 앞서 극복하기 시작한 한국이 이제 인권과 민주주의의 가치를 일본과 나눌 필요가 있는 것이다.
국가주의 넘어 과거청산을
그러나 개발지상주의에 중독돼 있는 한국 내 일부 국가주의자들은 식민지 시기의 개발까지 미화하면서 일본 내 국가주의자들과 공공연하게 ‘교감’을 나누고 있다. 또 다른 일부는 우리 역사 속에서 국가가 범한 테러에 대한 단죄 시도는 비난하면서도, 일본이 군국주의의 유산을 청산하지 못한 데에서 비롯된 독도문제, 일본 역사교과서 문제에 대해서는 흥분하는 모습을 보인다. 다행히도 한국 시민사회는 이렇듯 분별없이 ‘교감’을 나누고 ‘이중잣대’를 적용하는 우리 안의 국가주의자들을 ‘주변화’시킬 만큼 성숙해 있다. 하지만 동북아의 평화를 위해서는 일본 시민사회와 연대가 필요하다. 그리고 평화를 다지기 위해서 연대의 지평을 ‘동아시아’를 공유하고 있는 다른 아시아지역으로 넓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한국 시민사회가 ‘개발 이데올로기’와 ‘질서 이데올로기’에 짓눌려 있는 아시아 시민사회를 위해 무엇을 했는지를 자문해 보아야 한다. 한국 시민사회가 ‘방어적 민족주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였던 까닭으로 아시아를 보는 시야가 넓지 못하였음을 자인해야 한다.
외국계 자본의 진출을 ‘점령’으로 인식하면서도 현지 국가의 ‘무자비한’ 보호를 받으며 아시아에 진출해 있는 한국 기업과 그 막후에 있는 한국 정부의 윤리성 문제에 한국 시민사회는 얼마나 진지하게 접근했는가? 과거 베트남에서 행해진 다국적 테러에 가담한 가해자로서 과거사에 대해 한국 시민사회는 얼마나 국가적 차원의 반성을 촉구했는가? 더 이상 한국은 ‘정신적 외상’에 갇혀 있는 피해자 처지만은 아니다. 한국 역시 일부 아시아 사회에 정신적 외상을 남긴 가해자였으며 현재도 그러한 얼굴로 비추어질 수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한국과 일본, 나아가 아시아 시민사회의 연대는 한국 시민사회가 자민족중심주의로부터 벗어날 때, 그래서 보편적 인권에 보다 다가갈 때 한층 공고해질 수 있다.
한·일 시민사회를 둘러싼 환경은 악화일로에 있다. 위기는 기회라고도 한다. 지금이야말로 한·일 양국의 시민사회가 다른 아시아 시민사회와 함께 인권과 평화의 이름으로 동아시아를 미 일방주의로부터 지켜내고 국가주의의 파고를 격퇴하기 위한 ‘이중 민주화’ 프로젝트에 힘과 지혜를 모을 때다.
박은홍/ 성공회대 아시아엔지오정보센터 부소장
상호이해·교류만이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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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키즈키 노조미/ 메이지가쿠인대 교수(한국 근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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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과 엠에스엔 메신저로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는 “여러 곳에서 독도는 어느 나라의 땅이냐고 물어보기 때문에 외출하고 싶지 않다”는 말을 했다. 나 자신도, 1980년대 전반에 한국에서 같은 질문을 받았던 적이 있다. 정확하게는 기억나지 않지만, 영토 귀속에 대해서는 모호한 대답을 한 것으로 생각한다. 근대 외교사 연구자로서 많은 선배 학자들의 연구를 살펴 보았지만, 견강부회에 가까운 추단이나 자의적인 사료 조작이 너무 많아 유감스럽게도 아직 설득력 있는 논고를 보지는 못했다.
독도에 관한 한국과 일본의 영유권 문제에 대해서는 “어느 쪽이든 좋다”고 생각하는 일본 국민들이 적지 않다. 다만, 그것은 ‘침략의 결과’라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도, 한국의 주장을 인정해 한국 영토라고 받아들이기 때문도 아니다. 원래 영토 문제라고 하는 것은, 정부가 국제법이나 국제사회의 관례에 따라 적절히 처리하는 것이므로, 국민 개개인의 신념이나 바람, 생각, 외침이 자국 영유로 연결된다고 하는 사고방식에 입각한 것은 아니다. 어떻게 대답하든지, 영토의 귀속에는 그다지 관계없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시마네현의회에서 ‘다케시마(독도의 일본 이름)의 날’ 조례가 나온 이유의 하나는 그런 일본 사회의 영유권에 관한 사고방식에 대해서 갖는 초조함이라고 볼 수 있다. 또 일본 사회를 우경화시키려고 하는 세력에게 영토 문제는 ‘자국중심주의’를 선전하는 더 없이 좋은 재료이기도 하다.
최근의 ‘한류’나 ‘욘사마 열풍’, 그리고 그것이 한국에서 피드백된 결과로 나타난 한국인들의 일본에 대한 인식의 호전으로, 한-일 관계는 크게 바뀌었다고 한다. 실제로 한국과 일본이 서로 상대를 보는 시선이나 태도에는 큰 변화가 보인다. 한마디로 말하면, 일본의 변화는 무관심과 무지로부터 벗어난 것이다. 한국의 변화는 실상의 파악이다. 한국에서 특히 큰 변화는 감정론의 억제와 반일의 다양화일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일본 사회의 일부에는 “솔직하게 서로의 주장을 부딪치는 시대의 도래”로 보는 견해도 늘어났다. 게다가 ‘미래 지향’이 ‘과거를 불문에 붙이는 것’과 같은 뜻이 아닌가 하는 환상과 오해까지 생겨나버렸다. 과거를 알지 못하고서는 미래를 말할 수는 없다는 엄연한 사실을 잊기 시작한 것이다. 거기에 우파세력이 이용할 틈이 생겼다.
서로를 보는 시선 큰 변화
80년대까지 일본 사회에는 충분하지 않지만 주변국과의 관계를 고려하는 겸허함이 있었다. 일본의 우경화는 그런 겸허함을 버리고 ‘자국중심주의’로 바꾸려는 움직임이다. 82년과 최근 교과서 문제 사이에는 근본적 변질이 보인다. 당시는 리버럴한 교과서에 대해 문부성이 공격을 해 위로부터 ‘자국중심주의’를 강화하려 한 것인 반면, 지금은 우파 세력의 교과서를 정부가 방관해 일어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비판의 표적을 잘 가리지 않고 일본을 공격하면 일본의 우익을 돕는 결과를 낳는다”는 한국 언론의 분석은 적절할 것이다. 위에서 말한 ‘실상의 파악’에 의해 한국의 상대 분석이 성숙했다는 것을 실감한다. 다만, 교과서와 영유권 문제는 ‘일본의 진로’에 관계된다는 데서 접점을 갖고 있지만, 직접적 관련성, 즉 교과서 기술이 바뀌면 영유권 주장이 변화한다는 관련성은 없다.
한-일의 영유권 문제가 어제 오늘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점은 재론할 필요가 없다.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노래가 인기를 끈 지 20년이 지났고, <문화방송>이 텔레비전 드라마 <독도 수비대>를 방영한 것은 15년도 더 지난 일이다. 50년대 이후 두 나라 정부는 각각 역사·지리 연구를 인용하면서 많은 교환공문·외교문서를 주고 받으며 주장과 반박을 되풀이해왔다.
영토문제 40년 넘게 대립
영토 문제의 가장 어려운 점은 당사자 양쪽에 제각각 근거가 있다는 것이다. 연구 차원의 과제로 말하면, ‘1905년의 일본 편입 문제’는 양쪽 영토 주장의 수많은 근거 가운데 하나로 거론되는 것이다.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약간 전문적으로 말하면, 근대 이전의 동아시아의 질서 안에서 ‘영유’의 내용·기능·범위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에 걸친 국제법 질서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계승됐는지부터 밝혀져야 할 것이다. 이런 연구 차원의 해결되지 않은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책임이 연구자에게는 있다.
두 나라는 영토 문제에서 대립을 내포하서도 지금까지 40년 이상 상호 이해와 교류의 촉진을 위해 노력해왔고, 그것은 큰 흐름이 돼왔다. 교류와 상호 이해는 상대의 사고방식에 무턱대고 동조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상대의 견해나 주장에 귀를 기울이는 태도는 다문화 시대의 기본이다. 교류와 상호 이해의 확대가 곧바로 외교 현안이나 대립, 마찰의 해소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치나 행정의 차원이 외교라고 하는 채널을 사용해 해결을 지향한다고 한다면, 민중 차원에서는 교류를 통해 해결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는 것 외에는 길이 없는 것 아닐까?
아키즈키 노조미/ 메이지가쿠인대 교수(한국 근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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