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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 꾸미기 |
우리말에서 명사를 꾸며주는 말은 명사 앞뒤에 모두 올 수 있지만, 뒤에 오는 것이 더 기본이다. “그놈 참, 목소리도 우렁찬 것이 장군 감이다.” “며느리 손 큰 것 어디다 써?” 여기서 ‘것’이 영어의 관계대명사에 해당하고, 사람·동물·물건에 모두 쓰인다고 말한 바 있다. 위 예문은 다시 ‘목소리 우렁찬 그놈’이나 ‘손 큰 며느리’라고 차례를 바꿔 말할 수 있다.
자주 쓰는 입말에 편하고 쓸모있는 장치가 있건만 그것을 놓아두고 우리는 영어의 관계절을 언제나 명사(선행사) 앞으로 오도록 옮긴다. 그러다 보니 명사 하나에 꾸며주는 말이 여럿 붙을 때는 이들이 서로 충돌을 일으키는 일도 생긴다. “가방을 손에 들고 길거리에 서 있는 저 키 큰 젊은 남자”라는 구절을 보자. 영어로는 ‘저 키 큰 젊은 남자’가 먼저 오고, ‘가방을 손에 들고 길거리에 서 있는’ 부분이 관계절이 되어 명사 뒤로 붙게 된다. 이것을 영어 문장의 순서를 살려 “저 키 큰 젊은, 손에 가방을 들고 길거리에 서 있는 남자”라고 옮기면 뜻이 제대로 통하지 않는다.
이처럼 내용이 쉬운 것은 사람들이 잘 안 틀리지만, 추상적인 내용을 다룬 복잡한 문장을 이런 식으로 처리하면 이른바 ‘번역투’ 문장이 나온다. 번역하는 이 자신을 비롯하여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문장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콩 껍질 깐 것, 한 되”, “찹쌀 볶은 것, 반 공기”, 요리 책 같은 데서 이런 표현들을 흔히 본다. “별 하나, 나 하나”, 또는 “커피 한 잔 주세요.” “잔 큰 걸로 가져오너라.” 명사 뒤에 꾸밈말이 오는 것은 영어에도 많지만 우리말에는 그보다 더 많다. 다만 낱말을 이어붙이는 장치와 말의 차례가 서로 약간 다른 것뿐이니 그것만 알면 아주 요긴하게 쓸 수가 있다.
안인희/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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