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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변질되고 퇴색…다시 당당히 서겠다” 현실·실용파 얘기하듯…보통사람의 고민이 더 자리잡아
선 아니면 악이었던 구분은 이제 통하지 않아
‘끼’ 는 변하는 않는것… 좀더 성숙한 배우로 자리잡고파
“스스로 변질되고 퇴색됐음을 자인하고 안타까워하는 것은 김철식 때문입니다. 일제시대부터 4·19에 죽을 때까지 돈키호테처럼, 초지일관 민족과 민중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살면서도 끊임없이 웃음을 잃지 않은 김철식 말입니다. 겁없이 깨끗한 것을 바라본 그의 삶이 제 인생의 화두입니다.” 지난 11일 오후 한겨레신문사를 찾은 박철민씨(39)는 자신이 변했다고 했다. 그가 가장 오래 공연했고 또한 제일 좋아했던 연극 <대한민국 김철식>을 빗대어, 80년대 노동현장을 누비며 연극으로 세상을 바꾸겠다던 꿈을 돌이키면서 말이다. “대학로에 초대받아 순수 연극을 하게 되고 여러 연극, 영화도 하면서 참 변색됐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자괴감을 느낀 적도 많았죠. 변명이고 합리화 같지만, 현실이니 실용파니 얘기 하듯 보통 사람들의 욕구와 욕망, 고민이 더 자리잡은 것 같아요.” 고교시절부터 연극반에서 활동하던 박씨는 중앙대 경영학과에 입학하던 1985년 연극 동아리부터 들어갔다. 무대에 서서 관객과 만나 대화하고 연기하는 것 자체에 매력을 느껴 연극에 빠져들었던 고교시절과는 달랐다. 동아리 첫 작품 <금관의 예수>에서 느낀 것은 뭔가 달랐다. “김지하 선생의 <금관의 예수>를 하면서 느꼈죠. 아, 이런 얘기들, 사회에서 아파하고 갈등하는 이런 얘기들을, 내가 할 수 있는 연기를 하면서 동시에 관객들과 함께 웃으면서 아파하고 감동할 수 있구나. 그런 느낌들이 새로웠던 거죠.” 그리고 나서 김지하의 또 다른 작품을 만난다. 이 때 박씨는 완전히 넋이 나가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 그의 삶의 한 틀거리가 잡히는 순간이었다고 할까. 바로 마당극 <밥>이었다. “학교에서 마당극 <밥>이 초청 공연됐어요. 그걸 보고 전율했죠. 1시간40분 내내 1천여명이 모두 넋을 놓고 완전히 혼을 빼놓고 본 거죠. 처음부터 끝까지 큰 웃음으로 일관했는데, 메시지는 더불어 살자는 거였습니다. 굉장히 어려운 철학책·시론집을 너무나 해학적이고 풍자적으로 재밌게 풀어놓은 거예요.” 그게 연극의 정수이고 백미라는 깨달음은 곧, 그로 하여금 마당극 동아리를 만들게 했고, 훗날 극단 ‘현장’에 몸담게 되는 계기도 됐다. 그는 87년 어용 총학생회장을 몰아낸 자리에 앉기도 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재밌다. “제가 원래 총학생회장이었던 건 아니고요. 사회대 학생회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총학생회장이 어용, 부정선거 시비로 학생들에 의해 5월에 물러났어요. 재선거를 하기에는 남은 임기가 짧고 해서 단과대 학생회장 중 호선을 하기로 했죠. 제가 뽑힌 이유요? 누군가 그랬어요. ‘깡으로 싸우는 데 자신있는 철민이가 하는게 낫겠다’.” “과격한 쪽의 행동파라 엉겹결에 총학생회장 자리에 앉았지만” 나름의 효과도 있었단다. 싸움이 일상다반사였던 당시 대학에서 그는 학교 쪽에서 골칫거리로 여겼을 법하다. ‘교학과 유리창 깨기’로 시작한 등록금 인상 거부 투쟁은, 어렵잖게 관철됐다고 한다. “지금 학생회가 그러면 바로 구속될 거요. 그런데 그땐 그랬던 시절이었죠.” 이제 시대는 바뀌었다. 그의 말마따나 “이분법적 갈등은 이제 다양한 양상으로 바뀌었고, 선 아니면 악이었던 구분은 이제 통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가지 수가 너무 많아졌다.” 백기완 선생에 관한 얘기도 꺼냈다. 광대로서의 그가 가장 좋아하는 재담꾼 백기완 선생이 실은 그와 노선이 갈렸다는 것. “80년대 말 문익환·백기완 두 선생이 극단 ‘현장’의 큰 후원자셨어요. 그런데 두 분의 모습이 아주 재밌었죠. 노선이 다르다 보니, 한마디씩 하시면 상대방에 대한 ‘칼’이 섞여있더라고요. 그러나 시대를 끌어가던 양심적인 두분의 이런 모습은 제게 참으로 ‘귀여운’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학생들은 너무나 딱딱했죠. 백기완 왔다 그러면 엔엘(민족해방계열) 놈들이 뒤돌아 앉고, 문익환이다 하면 피디(민중민주계열) 놈들이 거꾸로 앉고…. 그래서 엔엘 쪽이던 동아리 후배들을 혼냈던 기억입니다.” 그는 졸업 무렵 극단 ‘현장’에 들어갔다. 노동연극으로 노동자들의 삶과 투쟁을 그리며, 노동자들이 모인 곳이면 전국 방방곡곡을 돌았다. 현대자동차 파업 현장에서 2천명씩 모아놓고, 지친 노동자들을 웃음으로 달랬다. 2~3일에 한번씩 대학가에 초청받아 다니면서 한 작품을 300~400차례씩 하기도 했다. 각종 문화집회를 누비며, 명 사회자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그의 당시 모습은 아직도 80년대 후반 대학생활을 거친 이들의 기억에 강하게 남아있다. 그렇게 5~6년을 ‘현장’에서 보낸 뒤, 그는 1년을 쉬겠다며 극단을 나왔다. 극단 동료와 만나 결혼도 했고, 출산도 앞두고 있었다. 처음 들어가서 ‘활동비’ 3만원 받던 거에 비하면 많지만 한달에 15만원을 받으며 생활비 60여만원을 감당하기도 어려웠다. 무엇보다 어떤 답답함이 컸다. “대학 때부터 연극을 한 10년째 하니까, 다른 연기도 해보고 싶고 영화도 해보고 싶었죠. 그런 갈등 속에서 우선은 애기 기저귀 값이라도 벌어야겠다 싶어서 일단 1년 쉬기로 하고, 과일 장사에 나섰어요.” 당장 운전면허증을 따고 중고 트럭을 사서, 가락시장에서 과일을 받아 서울 시내 곳곳에서 ‘차떼기’로 팔았다. 그러나 ‘광대’가 장사를 잘 해낼리 없었다. “비 오면 천막 내리고 과일 깎아 소주 먹고, 순대 가게에서 과일이랑 물물교환으로 안주 마련하고 했었죠.” <불멸의 이순신>이 첫 드라마 출연은 아니다. ‘현장’ 시절 자신의 공연을 봤던 한 피디의 권유로 에스비에스 단막극부터 시작했고, 최근엔 <햇빛 쏟아지다> <봄날> 등에서 작은 배역을 거쳤다. <목포는 항구다> 등 영화에도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예기치 않은 ‘오해’도 받았다. 지난해 탄핵 반대 촛불 집회 때다. “왜 철민이 형이 집회 사회를 안 보지? 철민씨는 이제 집회 사회에 안 서나? 그런 얘기들이 들리더라고요. 사실 창피했습니다.” 90년 안팎, 한참 문화집회들이 이어질 때, 2만~3만명씩 모아 놓고 웃기고 울리고 들었다 놨다를 자유자재로 하던 그다. 2000년 전까지도 문화집회 사회는 무조건 “내가 해야 하고 내가 설 자리”라 생각했던 그가 이젠 대중 집회 사회에 나서지 않는다. 이유는 뭘까? “지금은 창피합니다. 내가 배우인데, 배우로서 확실히 사랑을 얻고 나서 무대에 서야 당당할 것 같아요. 나를 아는 사람은 민주집회, 노동현장에서 적극적이었던 노동자와 민주시민과 학생들뿐이거든요. 스스로 어줍잖은 거에요. 차라리 (권)해효 형이나 (명)계남, (문)성근 형이 섰을 때가 훨씬 호응이 좋아요.” 이제 그는 보다 성숙한 배우로 자리 잡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나서 다시 옛 무대에 당당히 서겠다고 했다. “겨우겨우 삶의 각박함 속에서 아둥바둥 살면서 고작 몇몇 단체들을 후원하는 수준”이지만. “그래도 연극으로 더 나은 더 예쁜 세상을 만들겠다고 나섰던 제가, 가끔 술 먹고 안타까운 넋두리를 하지만, 또 다음날은 좋은 작품 안들어오나, 연기 자체에 배우 자체에 정신이 꽂혀 있어요. 그 중심에서 사고 하고 행동하는 거죠.” 변하지 않은 것을 그는 이 대목에서 찾는다. 그 안에 자리 잡은 ‘끼’다. 연극으로 한달내내 객석을 꽉 채워 7천명과 만났다면, 이제 영화와 드라마로 몇십만 몇백만과 만나며 “내 연기에서 향기가 난다면, 사람들이 향내를 맡게 하고 싶다”는 것. 그리고 <불멸의 이순신>이 끝나고 난 뒤, 9월께 정겨운 연극무대에도 다시 선다. 글 김진철 기자 nowhere@hani.co.kr 사진 김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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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뷰 뒤안길
민주대머리? 옛 별명은 이제 잊어주세요
<불멸의 이순신>의 ‘김완 장군’ 박철민씨를 보며, 연극 배우 박철민을 떠올리는 이들은 있을 지언정 그가 한때 문화집회의 명 사회자였음을 알아채는 이들은 거의 없다. 갑옷 때문이기도 하지만, 외모도 상당히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제 옛날 별명은 잊어 주세요. 요즘 팬 카페에 들어오는 분들 중엔 그 시대 사람들도 거의 없고요. 이젠 부담스럽네요. 별명이 이젠 어색해요.”
그는 인터뷰 끝자락, 자신의 옛 별명을 잊어달라고 했다. 영화와 드라마로 새 출발에 나선 터라, 부담스러운 까닭이다. 이젠 별명도 ‘민사마’다. 젊고 어린 팬들이 많다.
집회 사회자로 이름을 떨치던 시절, 그는 ‘통일 넙죽이’ 정정회씨와 함께 ‘민주 대머리’로 통했다. 당시 미움을 받던 ‘독재 대머리’만 있는 것은 아니라며 무대에서 너스레를 떨던 것이 별칭이 돼 버린 것이다.
90년대 앞뒤로 3년간 2인극을 함께 했던 정씨는 이제 평범한 주부로 돌아갔단다. “참 재주 많았던 친구인데, 안타깝죠. 노래, 춤, 연기 다 되는데…. 요즘 티브이나 영화가 섹시한 여성들만 바라는 세상이라 얼굴이 좀 커서 어렵긴 하지만, 조연 연기는 정말 감칠맛 나게 잘 할 수 있는 친군데 말예요.”
옛 별명을 벗은 그는 그러나 ‘민주’라는 수식어까지는 버리기 어려워 보인다. 극단 ‘현장’ 대표 박인배씨에게 전화가 왔다는 얘기를 했다.
“어제 촬영장에 가는데 박 선배가 전화를 했더라고요. ‘현장’에서 하는 작품 한 번 해야지 않겠냐고요. 9월 연극이 잡혀있어 죄송하다고는 했지만, 마음의 빚은 말할 수 없이 커요.” 그는 최대한 빨리, ‘현장’의 무대에 서고 싶다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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