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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항리 오층석탑 전경. 지붕돌이 깨어진 서탑과 기단부 없이 주저앉은 동탑이 마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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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실측 첫 등장 도굴꾼 동탑·서탑 폭파
서탑만 가까스로 복원 신라탑 조형미 ‘주춧돌’ 장항리 탑에 대한 문헌기록은 1933년 일본 건축사가 후지시마가 낸 실측보고서격인 <조선건축사론>에 처음 나온다. 그는 20년대 도굴범이 폭약을 터뜨려 서탑과 동탑이 무너진 상태였다가 32년 서탑은 복원되었으나 동탑 몸돌과 지붕돌 부재들은 계곡과 인근 언덕에 흩어져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후지사와는 동탑과 서탑 양식은 거의 흡사하니 더이상 상술하지 않겠다는 요약글과 서탑 복원설계도, 박살난 서탑과 동탑의 처참한 몰골을 담은 사진을 남겼다. 요행히 서탑은 곧장 복원됐지만 동탑은 끝내 제모습을 찾지 못했다. 30여 년 뒤 계곡을 뒤져 찾은 부재로 몸돌과 지붕돌을 끼워 맞추었으나 기단석 등 부재 일부는 찾지 못해 앉은뱅이마냥 기형적인 모양새를 갖게 되었다. 게다가 중문, 강당, 회랑터 등의 절터 시설 등은 조사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절터로는 너무 좁은 점으로 미뤄 후대에 터 일부가 산사태로 쓸려내려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물론 재앙 당한 탑을 복원하려는 후대인들의 노력 또한 치열했다. 서탑 복원 때 주변에 있던 깨어진 불상을 경주박물관으로 옮겼는데, 74년 온전한 불상 복원을 위해 국립경주박물관과 문화계 인사들이 계곡과 주변을 샅샅이 훑는 수색작전을 벌인 끝에 불상의 상반신이나마 복원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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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경위와는 별개로 탑이 가진 미술사적 의미는 크다. 8세기께로 연대가 짐작되는 이 탑은 감은사, 고선사탑으로 대표되는 통일신라 초기의 안정감 넘치는 탑파 양식이 문화적 기세를 안고 더욱 세련된 장식적 양상으로 변화하는 도정에 놓인 중간고리 구실을 한다. 육중한 크기에 섬세한 인왕상 장식과 몸체의 절묘한 체감률 등을 반영해 불국사 삼층석탑, 곧 석가탑의 완숙한 비례미와 조형성으로 가는 징검다리가 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탑을 사랑스럽게 만드는 것은 악동같이 귀여운 인왕상들의 새김부조다. 석탑에 인왕상 등을 새겨넣는 조각유행은 7세기 분황사 석탑에 처음 나타나며 장항리 탑이 그 뒤를 잇는 사례에 해당한다고 보고 있다. 국가적 기상의 고양을 강조하던 통일초만 해도 석탑 각면에 기둥을 새기는 것 외에는 다른 문양을 새기지 않는 것이 상례였으나 이 탑부터 크기가 점차 줄면서, 장식적 조각수법이 본격화하는 분기점이 된다. 고유섭은 <조선탑파의 연구>에서 “장항리 석탑은 불국사 석가탑을 선행하는 신라 중대 이후 양식 ”이라고 고찰하면서 “중대 이후 탑파 자신에 농후한 장식적 의사가 더해지면서 전대에서 볼 수 없는 비건축적 장식탑파의 유행을 보게된다”고 분석하고 있다. 사방몸돌에 고리 달린 문장식을 새기고 그 양 옆에 인왕상을 조각한 장항리탑의 경우 조각이 석탑 몸돌자체의 존재와 대등하게 부각되고, 층마다 탑신은 한개의 몸돌로 모델화하는 흐름이 본격화한다는 것이다. 막 발돋움하는 통일신라 미술의 조형의지가 절정에 이르기 위해 한번 굽이를 돌고 익어 막 숙성하려는 단계의 산물이 장항리 탑인 셈이다. 피부빛에 구멍 송송 뚫린 서탑과 주저앉은 동탑에 새겨진 인왕상들의 앳된 용모에서 답사객들은 소박미와 세련미를 융합시키며 양질전화하는 당대 미술문화의 힘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초봄 저녁 노을지는 토함산 자락서 본 쌍탑의 느낌은 또 다르다. 4, 5층 머리가 일부 깨어진 서탑 뒤에 기단을 잃고 애처롭게 주저앉은 동탑과 주인 없는 불상대좌 잔해가 어린 병자 같다는 생각도 들게 하는 탓이리라. 석탑 몸돌들과 대좌석들은 아무 말이 없다. 탑을 짓고 부수는 것은 사람의 업이니 애닯고 서러운 것은 결국 사람 마음이란 말인가. 경주/글·사진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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