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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에 의해 ‘옥쇄’와 ‘집단자결’을 강요당한 오키나와 주민들의 모습. 오키나와전은 침략과 전쟁의 논리로 무장한 국가권력이 힘없는 민중들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간 동아시아 현대사 최대의 비극 가운데 하나였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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⑨ 오키나와 전쟁 주민·어린 병사등 ‘전쟁 희생자’ 명확히자살
특공대 등 과정·배경 2쪽 걸쳐 상술
한·중 교과서 언급없어 ‘잊혀진 역사’
일본 후소샤판 ‘영웅적 전투’ 로 왜곡 오키나와 전투는 아시아·태평양 전쟁 중 미군과 일본군 사이에 벌어진 최대 규모의 전투였다. 그러나 동아시아 세 나라의 역사 교과서에서 오키나와전은 ‘잊혀진 전쟁’이나 다름없다. 자국사 중심의 서술을 택한 한국·중국의 역사교과서에 오키나와전은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한국의 경우, 선택과목인 <세계사> 교과서에서도 오키나와전을 소개하는 서술이 없다. 반면 일본 후소사판 역사교과서는 비장한 어조로 이를 자세히 소개한다. “일본군은 전함 야마토호를 출전시켜 최후의 해상특공대를 출격시켰지만, (미군의) 맹공을 받아 오키나와에 도달하지 못하고 격침됐다. 오키나와에서는 혈근황대의 소년과 히메유리 부대의 소녀들마저 용감히 싸워… 10만명에 가까운 병사가 전사했다.” 23살때 오키나와에서 전사한 특공대원의 유서도 따로 소개한다. 여기서 오키나와전은 ‘군국주의’에 대한 향수를 부추기는 영웅적 역사다. 반면 도쿄서적판 역사교과서는 “미군은 오키나와에 상륙해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오키나와인들은 아이·학생을 포함해 많은 희생자를 냈다”는 본문 서술과 “이 전쟁에서 현민 희생자는 당시 현 인구의 4분의1에 해당하는 12만명 이상으로 추정된다”는 관련 사진 설명문이 전부다. 이 교과서만 보자면, 오키나와전 ‘희생자’의 실체는 전혀 짐작할 수 없게 돼 있다. 그 진실은 한중일 공동교과서 <미래를 여는 역사>에 있다. 2쪽에 걸쳐 오키나와전의 전개와 배경을 상세히 적었다. “사람이 폭탄을 안고 돌격한 특공대가 가장 많이 투입된 전투”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오키나와 현 자료를 인용해, 미군 1만2500명, 일본군 9만4000명, 주민 9만4000명이 전투 중 사망했고, 이후 말라리아 지대에 강제 이주돼 사망한 사람도 수만명에 이른다고 적었다. “주민 사망자 중에는 전투에 휘말려 죽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본군에 의해 집단자결로 내몰려 죽은 경우와 스파이 혐의로 살해된 경우, 피난했던 참호에서 군대가 쫓아내 죽은 경우가 다수 포함됐다”고 밝혔다.
90년대 들어 오키나와에 세워진 ‘평화의 주춧돌’에는 가해자·피해자를 가리지 않고 23만9209명의 전사자 이름이 새겨져 있고, 이 가운데는 한국인 341명, 대만인 28명 등의 이름도 있다고 소개했다. “한반도에서 무려 1만명이 (오키나와로) 끌려와 진지구축과 탄약운반에 동원됐고, 100개가 넘는 오키나와의 군 ‘위안소’에 조선 여성 다수가 일본군 위안부로 수용됐다”고 적었다. <미래를 여는 역사>는 이런 서술을 통해 오키나와전의 ‘희생자’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했다. 변방의 주민으로 지내다 ‘총알받이’로 내몰린 오키나와 주민,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온 한국인·대만인 등의 식민지 주민, 그리고 군국주의에 세뇌당해 스스로를 ‘소모전’에 바친 어린 병사들이 이 전쟁의 희생자다. <미래를 여는 역사>는 “이런 쓰라린 경험을 통해 평화에 대한 강한 염원이 오키나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새겨지게 됐다”고 적었다. 오키나와전을 세 나라 학생들에게 동시에 가르치는 이유다. ‘평화에 대한 강한 염원’은 이제 오키나와를 넘어 동아시아 전체로 확산돼야 마땅하다는 게, 공동교과서 집필진들의 믿음이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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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는 주민을 보호하지 않는다” 오키나와 주민의 피맺힌 깨달음
과거 류쿠(琉球)로 불렸던 오키나와는 일본 남단 약 1000km에 걸쳐 있는 섬들로 이뤄진 곳이다. 오키나와는 원래 독립 왕국이었다. 15~16세기 대교역시대에는 명·조선·일본과 활발한 대외 무역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류쿠는 1609년 사쓰마 번(오늘날 가고시마 현)의 무력 침공·합병으로 명과 사쓰마 번의 지배를 받는 양속(兩屬:양 쪽에 속함)관계를 갖게 됐다. 이후 류쿠왕국은 1872년 류쿠번으로 격하되고, 1879년 군대와 경찰을 동원한 일본정부에 의해 국왕이 폐위된 뒤, 오키나와현으로 개칭됐다. 1945년 패전이후에는 미군 점령 아래 있다가 1972년 일본으로 복귀했다. 미군은 오키나와 상륙 직후부터 요미탄과 가데나 기지를 점령해 이를 단기간에 확장·정비하고, 남부 전선의 군사 작전, 일본 본토 폭격, 군수물자의 수송 등을 위한 군사기지로 사용했다. 이는 오늘날도 계속돼 오키나와는 동아시아 주둔 미군의 후방 보급기지 역할을 하고 있다. 맥아더가 오키나와를 ‘우리의 천연국경’이라 했듯이, 중국을 가상 적국으로 설정한 미국에게 오키나와의 중요성은 더욱 강조되고 있다. 현재 오키나와 미군기지의 규모는 전체 현 면적의 10%를 넘고 있다. 미군기지의 편의성을 가장 중시하는 미국의 입장은 ‘오키나와에 미군기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미군기지 속에 오키나와가 있다’는 말로 축약된다. 그러나 미군에 기생하는 삶에서 벗어나 평화와 환경보전을 주장하는 오키나와인들의 목소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오키나와인들의 상당수는 한 평씩의 땅을 사들여, 자기 땅 위에 있는 미군 기지의 철수를 요구하는 투쟁에 참여하고 있다. 시민들은 미군 기지 옆에 망루를 설치해 매일 뜨고 내리는 항공기들을 감시하고 있다. 지난 1987년 전국 체육대회가 열리던 요미탄 경기장에서 식료품점을 운영하는 평범한 시민인 치바나 쇼이치가 전쟁의 표상인 히노마루(일장기)를 끌어내려 불태운 것은 오키나와인들의 저항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당시 체전 개막행사에 참가한 고교 악대는 기미가요(국가)의 연주를 거부했고, 한 여학생은 일장기를 하수구에 처박았다. 이런 투쟁의 배경에는 오키나와전을 통해 평화의 소중함을 체득한 오키나와 사람들의 믿음이 자리잡고 있다. ‘군대는 주민을 보호하지 않는다’는 이들의 깨달음은 미군기지의 철수가 전쟁 없는 오키나와를 이룰 수 있다는 신념으로 굳어졌다. 박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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