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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하는 남편과 돈 버는 아내를 그린 TV 드라마 <불량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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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한계를 넘는 콘트라 섹슈얼족을 말하다
영화 <밀리언달러 베이비>의 주인공 매기는 자신이 이제 삶을 끝내도 될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세상을 보았고, 무언가를 이루었어요.” 서부 영화의 주인공처럼 무언가를 이루고 석양 속으로 사라질 운명의 매기가 가진 삶의 리스트에는 애초부터 결혼이라든가 사랑처럼 자신을 속박할 치명적인 방해물은 없었다. 지난 수십년 동안 여자들은 인생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서서히 바꾸어왔다. 그리고 그 변화가 2005년 ‘콘트라 섹슈얼족’이라고 불리는 현대의 아마조네스들을 낳았다.
루이 아라공의 ‘미래의 시’는 다음과 같이 여자를 노래한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여자는 남자의 영혼을 장식하는 컬러 물감이다/ 여자는 남자를 활기 있게 해주는 떠들썩하고, 우렁찬 소리이다/ 여자가 없으면 남자는 거칠어질 뿐 열매 없는 빈 나뭇가지에 불과하다/ 여자가 없으면 남자의 입에서는 거친 들바람이 나오고/ 그리하여 남자의 인생은 엉망으로 헝클어지고 황폐해져’
그런데 이 시의 화자를 여자로 바꾼다면 시는 이렇게 되지 않을까? ‘남자는 여자의 과거다/ 남자는 여자의 영혼을 어지럽히는 질환이다/ 남자는 여자가 지루할 때까지 끊임없이 투덜거리고, 중얼거리는 소리다/ 남자가 없어도 여자는 아름답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남자가 없어도 여자의 입에서는 고운 휘파람소리가 나오고/ 그리하여 여자의 인생은 누가 옆에 있든 없든 언제나 단정하고 침착하게 앞날을 향해 나아갈 뿐이다.’
‘남자 없는 세상’을 꿈꾼다
남자의 존재가치를 아예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급진적인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에 불과했을 생각이 이제 많은 여성들의 생활에서 사회적 ‘현상’으로 굳어져 가고 있다. 최근 영국의 미래학 연구소는 ‘반대’의 뜻을 가진 라틴어의 콘트라와 ‘성’이란 의미의 섹슈얼을 조합해 ‘콘트라 섹슈얼’(contra-sexual)이란 말을 고안해 냈다. 유럽과 미국에서 △진짜로 사회에서 성공하고 많은 돈을 벌길 바라고 나머지 것들은 그 뒤에 놓고 있으며 △적어도 30대 중반까지는 결혼이나 아이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고 △아무 조건 없는 섹스는 즐기지만, 섹스나 데이트가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는 여성들이 사회의 새로운 조류를 형성하고 있다는 사회적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다.
영국에서는 80%에 육박하는 여성이 결혼보다 직업을 우선시하는 것으로 조사됐고, 일본 여성들의 독신률은 54%에 달해 둘 중 한 명은 ‘남자 없는 인생’을 꾸려가고 있는 셈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최근 발표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미혼여성의 29.6%가 결혼 계획이 없으며, 그 이유는 주로 일 때문이라고 답해 우리나라도 ‘콘트라 섹슈얼’의 시대로 빠르게 달려가고 있는 중임을 보여준다.
콘트라 섹슈얼족을 페미니스트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보다는 태어나서 교육받을 때부터 ‘자신에게 가장 좋은 생활방식을 합리적으로 택하는 일에 익숙해져 있는’ 여성들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양성 평등’에 목숨 건다기보다는 성공이나 출세에 크게 관련되지 않는다면 남자라는 존재를 새 아파트에 딸려오는 공기청정기 정도로 여긴다. 가정과 일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쫓기 위해 늘 헐떡이며 살아야 했던 ‘일하는 슈퍼우먼’으로는 살지 않겠다는 것이다. 콘트라 섹슈얼족들은 집안의 실세가 되느니 차라리 사회적 강자가 되기를 열망하고, 건강한 가정보다는 자신만의 권력을 가꾸는 데 관심이 많다.
사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오래전부터 예견되어 왔던 일이다. 지난해 여름, 한국에도 소개됐던 과학서적 <아담의 저주>에서 세계적인 유전학자 브라이언 사이키는 이미 ‘남자 없는 미래’를 예언했다. 근거는 이렇다. 현재 지구촌 남성의 7% 정도가 불임이며, 진화의 시간으로는 한순간에 지나지 않는 10만년 후, 정자는 절멸하게 된다는 것이다. 본래 Y염색체가 생물학적으로 열등한 쭉정이 유전자이며, 지구상에 불행, 빈곤, 파괴의 악몽을 전파한 주범이라는 절망적인 선고를 내린다. 이 유전학자는 아예 Y염색체를 포기하라고 충고한다. 그리고 Y염색체 없이 ‘여성+여성’ 수정란을 만든다는 파격적인 대안을 제안한다. 그의 분석이 어느 정도 사실에 기초한 것이든 아니든 현대 남성성은 과학과 사회, 철학 모두로부터 절망적인 파산 선고를 받은 듯 보인다. 물론 폭력성, 권위주의, 우월주의, 마초 등의 부정적인 점에서만 그렇다. 힘과 에너지는 콘트라 섹슈얼족들이 적극적으로 차용하고 열망하는 가치다.
콘트라 섹슈얼족의 특징을 감성, 비이성 같은 과거 여성성에 대한 고정관념으로 재단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진짜로 성공하고 말 거야
케이블, 위성TV 여성 라이프 스타일 채널 온스타일은 <싱글즈 인 서울 시즌3-콘트라 섹슈얼> 방영을 앞두고 설문조사를 했다. 총 3217명이 참여한 이 조사에서 절반 이상이 ‘나는 콘트라 섹슈얼족’이라고 믿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애인이 사회생활을 반대할 경우 일과 사랑 중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63.4%가 주저하지 않고 일을 선택했으며 51.8%가 50대 이상까지 사회생활을 하겠다고 대답했고, 36.8% 이상이 자신이 CEO까지 성취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였다. 23일부터 방영될 예정인 <싱글즈 인 서울 시즌3-콘트라 섹슈얼>도 콘트라 섹슈얼을 대표하는 10명의 싱글 여성들의 일과 삶을 리얼 다큐 형식으로 다룰 예정이다.
온라인 쇼핑회사에서 상품 마케터로 일하고 있는 김형영(34)씨는 연애는 하지만 결혼은 염두에 두지 않는 자신도 분명 콘트라 섹슈얼족에 들어간다면서 자신과 같은 20, 30대 여성들을 위한 자기계발 상품 판매에 주력을 두고 있다고 한다.
몇 년 전 제일기획은 여성 마케팅에 대한 보고서에서 여성의 자부심을 자극하는 마케팅만이 성공할 수 있다고 하면서 특히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차지하는 여성들이 시장의 주류를 차지할 가능성을 예견했다. 그리고 최근 다시 ‘2004년 우리 시대 남녀의 조용한 혁명’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아예 남녀의 성정체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완전히 버릴 것을 권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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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뉴욕 여성들의 솔직한 성생활을 그린 시트콤 <섹스 앤 시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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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보고서에 따르면, 외모와 패션뿐만 아니라 취미와 문화, 가정과 일에서 남녀의 경계는 철저히 무너졌으며 그 결과 꽃미남이라 할 수 있는 미스터 뷰티(Mr. Beauty)와 강한 여자, 미즈 스트롱(Ms. Strong)이 보편적 남녀상이 될 것이라고 한다. 이 결과에서 흥미 있는 것은 여자들의 반응이다. 미즈 스트롱에게 “당신은 남성성을 갖고 있는 여성이다”라고 말했을 때의 반응은 ‘능력(30.2%), 자부심(25.6%), 만족감(23.3%)’이었다. 자신들의 능력에 대한 자부심과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모습으로 완성됐다는 즐거움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들은 격투기와 복싱을 좋아하고, 첨단 가전제품을 마음대로 조작하고, 여성 CEO의 리더십 세례를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성공의 실체는 분명하지 않지만 콘트라 섹슈얼족의 성장이 여성의 사회 진출과 교육 정도에 비례한다는 사실에 비추어볼 때, 고소득과 사회적 지위에 기초함은 분명하다. 국내 제일의 전자회사에서 과장으로 일하고 있는 한 아무개씨도 자신의 목표는 최소한 ‘이사’라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자신이 아이를 낳거나 기르는 일을 상상해 본 적이 없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이런 여성들의 상징이자 모델이 된 유명 여성들의 자서전과 강연회는 늘 붐비며, 에너지가 넘치는 몸을 가꾸기 위한 건강 상품들, 남성적이고 시크한 느낌의 패션 브랜드가 인기다. SUV 자동차와 고급 와인 등 자신의 충전과 사회적 교제를 위해서라면, 아낌 없이 투자하기 때문에 경제적 불황기에도 콘트라 섹슈얼의 수입과 소비는 별반 변화가 없다. 콘트라 섹슈얼족이 경기 침체기에 더욱 각광 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여자들의 세상, 그 이후에는?
이쯤 되면 지금은 기껏해야, 연애와 소비에 대한 담론이 떠들썩한 <섹스 앤 더 시티>나 살림하는 남편과 돈 버는 아내를 그린 <불량주부>가 맹위를 떨치는 TV에서 곧 여성 중심의 기업 드라마나 여성들의 성공 신화를 그린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 날을 상상해 보는 것도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이렇게 현실을 앞질러가며 소비와 여성 우위의 시대가 된 듯한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콘트라 섹슈얼론에 대한 비판도 물론 만만치 않다.
‘콘트라 섹슈얼에게 진정 사회적인 역할을 기대한다면 아직도 여성들에게 교묘하게 닫혀 있는 조직과 사회의 벽을 허무는 일이 급선무’라는 한 칼럼니스트의 말처럼 많은 여성들에게 콘트라 섹슈얼이 대안적인 라이프 스타일로 받아들여지기에는 아직 사회적 현실이 각박하다.
문화평론가 변정수씨는 일하는 여성에 대한 대우가 평등하고 사회보장제도가 잘 갖춰진 나라에서는 콘트라 섹슈얼족으로 살 것인가가 선택의 문제일지 몰라도 아시아, 특히 우리나라처럼 일과 가정이 한번도 평화롭게 조화되어 본 일이 없는 나라에서 사는 여성들이 달리 무슨 선택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오히려 콘트라 섹슈얼족들의 삶의 모습에서 신자유주의가 요구하는 삶의 양상 그 자체를 봅니다. 여성을 최후의 식민지로 남겨두지 않고 신자유주의 전사로 포섭하려는 전략 아닙니까?”
소비와 성공, 그 이후에 어떤 삶의 모습을 만들 것인가. 콘트라 섹슈얼족이 백인 여성들의 성공담을 넘어서는 모든 여성들의 라이프 스타일임을 주장하기 위해 답해야 할 질문이다. 남은주/ 한겨레 문화센터 mifoco@hani.co.kr
미래를 여는 한겨레 경제주간지 <이코노미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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