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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로에 의해 절터가 두동강난 봄날 사천왕사터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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⑮ 경주 사천왕사 ‘쏴아…쏴아…’ 아지랑이 피는 경주의 봄, 시내 근방의 이 절터에서 답사객들은 봄바람에 제 몸 비벼 내는 대나무 숲의 목소리를 듣는다. 마음 설레는 신라인들의 구애일까. 몽롱한 상념에 젖는 것도 잠시, 한쪽에서 ‘빠앙!’하며 덜컹거리는 열차 굉음이 귀를 찢고 지나간다. 아! 사천왕사! 절터 옆 대나무 숲 소리는 철로에 동강난 옛 명찰의 비극을 호소하는 애원성이었던가. 20세기 철로와 경주-울산간 산업도로에 땅이 찢긴 사천왕사터의 봄풍경은 덧없다. 외적을 물리친 원력을 키웠던 호국사찰터의 퇴락한 모습은 무자비한 역사의 낫질이 남긴 흔적 자체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의 문헌으로 더듬어본 사천왕사터의 의미는 하늘만큼 높고 바다만큼 깊다. 사천왕사는 삼국통일 뒤 신라까지 삼키려는 당나라 대군을 신묘한 주술로 몰아낸 호국사찰로 저간에 알려졌다. 하지만 절터는 원래 신들이 거니는 숲(신유림)이라하여 일찍부터 나무베기가 금지되었던 성소였고, 나라의 흥망과 연관된 숱한 전설의 보고였으며, <제망매가>를 지은 스님 월명사의 향가가 피리소리와 함께 달을 울렸던 전통시가의 고향이기도 했다. 당나라 대군 주술로 격침
고려때도 영험 왜구 물리쳐
일제 절터 갈라 철길 퇴락 절터는 신라인들이 불가의 도리천(하늘나라)이라고 여겼던 낭산의 기슭에 있었다.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남산을 서쪽으로 보며 불국사 가는 길가쪽이다. 현재 당간지주, 두마리의 비석귀부, 목탑·금당·강당터 등이 오롯이 잡풀 속에 남았다. 사찰 건물은 문무왕 19년인 679년 세워졌지만, 674년부터 가건물을 세워 법석을 급히 마련했으니, ‘문두루 비법’이란 기상천외한 주술로 당나라 대군을 물리치기 위함이었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절의 창건내력은 마치 ‘007작전’을 떠올리게 한다. ‘문두루 작전’은 동맹국 당나라가 674년 신라를 치려고 50만 대군을 일으킨다는 첩보를 유학갔던 의상대사가 돌아와 알리면서 시작된다. 문무왕은 신하들과 대책회의를 열다 계책을 얻었다. 용궁에서 비법을 배웠다는 명랑법사로부터 사천왕사를 지어 호국주술을 행하라는 아이디어를 받은 것이다. 다급한 마음에 채색한 비단천으로 절모양만 급조한 뒤 그 안에 짚풀로 오방신상을 모셨다. 그 앞에서 명랑법사와 고승 12분이 낮밤으로 나라 지켜달라고 발원을 거듭하니, 서해에 강풍이 불어 대기하던 당나라 군선들은 모조리 침몰했다. 당나라는 다시 쳐들어왔지만 역시 문두루 주문에 걸려 병사들은 물고깃밥이 되고, 신라 정복을 단념했다. 문두루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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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영험을 입어 절에는 후대에도 이적이 잇따랐다. <삼국사기>에는 9세기 통일신라의 혼란기에 절 벽화의 개가 나와 짖거나 탑의 그림자가 거꾸로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는 묵시록 같은 이야기들을 전한다. 고려 태조와 문종 등도 중창하거나 문두루 법회 등으로 왜구 등을 물리쳤다고 하며 <동국여지승람>에는 조선 개국공신 하륜이 절에서 묵으며 주지와 시국을 논한 뒤 근처에 원(숙박소)을 세웠다는 구절이 보인다. 이런 호국사찰의 면모를 지금도 보여주는 실체가 절터에서 나온 수십여 편의 녹유 사천왕 부조조상들이다. 정성스럽게 녹색, 갈색 유약을 입히고 악귀를 짓누르는 사방 사천왕상의 모습들을 부조로 새긴 유물들은 1980년대 경주박물관의 노력으로 상당부분 복원되었다. 명승 양지 스님의 것으로 전해지는 부조상들은 유일하게 작가를 알 수 있는 고대 조각품이다. 중앙아시아 실크로드 회화의 생동감을 이어받아 팔, 다리 근육 등은 놀라운 현실적 동감을 자랑하며, 악귀 등이 짓는 표정의 미묘함과 다기한 자세들 또한 압권이다. 목탑터는 단탑 가람에서 통일신라 특유의 쌍탑 가람을 처음 시도한 증거이기도 하다. 어이없게도 근대 들어 절터의 문화유산적 가치를 재조명한 이들은 선인들이 사천왕사에서 몰아내기를 빌었던 옛 왜구의 후손들이었다. 20년대 초 한 일본인 수집가가 거의 도굴하다시피 서탑터를 발굴해 사천왕 부조상과 보상화문 전돌 등의 유물들을 박물관에 팔아치우면서 절터의 가치는 다시금 평가를 받게 된다. 하지만 총독부는 실측 외에 발굴조사를 철저히 외면했다(지금까지 미뤄졌다). 일본 건축사가 후지시마조차도 30년대 저작인 <조선건축사론>에서 “총독부가 절터 땅을 사들여 보존 중이나 발굴조사를 위한 운동을 했는데도 물거품이 된 것은 애석하다”고 털어놓았을 정도다. 총독부는 급기야 30년대 동해남부선 철도를 절터의 금당과 강당터 사이에 내는 만행을 저질렀다. 반외세적인 유적이니 눈엣가시처럼 여겨 그 의미를 깎아내리려는 속셈이었음이 분명하다. 반일 함성으로 차고 넘치는 요즘, 사천왕사터는 뿌리깊은 민족갈등을 색다르게 추체험하게 하는 문화유산인 셈이다. 다행히 5~6년 뒤 경부 고속철 경주 새역사가 건천쪽에 들어서게 되어 절터를 짓누른 철로는 걷히게 된다. 그 날을 한시라도 앞당기는 것이 지금 우리의 사명임은 말할 것도 없다. 경주/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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