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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5.01 17:26 수정 : 2005.05.01 17:26

황윤석의 <이재난고>는 조선 후기 선비들의 미술품 감상, 거래 등의 관행과 미술계 사정을 생생하게 전하는 사료다. 사진의 도판은 복날 선비들의 풍류 모임을 그린 표암 강세황의 <현정승집도>다.



김관식 교수 ‘황윤석 일기 이재난고’ 분석
미술품 거래·감상 등 서화동네 얘기 풍성

‘저 형형색색이 진짜인가? 가짜인가? 저 형형색색이 육신인가? 정신인가? 거기에 사람이 있는데, 신선인가 부처인가 마귀인가? 아니면 서양 선비 천주씨 바로 그 사람인가?’

18세기 영·정조 시대를 살았던 실학파 선비 황윤석(1729~1791)은 그의 일기 <이재난고>에서 선물받은 서양 그림 족자에 쓴 제발(그림 등에 직접 쓰는 감상의 기록)내용을 이렇게 소개했다. 글에는 놀라움과 경계심이 어려있다. 원근과 투시법을 써서 사실성을 강조한 서양 그림의 묘사력 앞에서 이 조선의 선비는 실제와 가상 사이의 혼돈을 느꼈던 눈치다. 보았던 그림이 가톨릭 성화였던 듯 예수를 ‘천주씨’라고 표현했다. 특히 이 족자는 심심산골이던 강원도 영월의 중인에게서 선물 받은 것으로 나와 당시 서양화가 나라 안 곳곳에 나돌았다는 낯선 사실을 일러준다. 그런가하면 그는 한양성 장안의 양반집마다 미인도를 사서 내거는 유행을 보면서 이렇게 한탄한다. ‘대갓집 그 어디나 미인들 많으리니/ 그림 있는 곳마다 화려하게 빛나리/ 한때의 화가들 모두 부자 되었지만/아! 나는 돈이 없으니 어찌 할 거나?’

<이재난고>는 황윤석이 10살부터 죽을 때까지 무려 54년간 쓴 일기다. 52권 57책에 수백만 자의 일상기록을 초서체로 옮긴 이 생활사 자료는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방대한 개인기록이다. 지난해 읽기 어려운 초서체를 활자체로 고쳐 10권짜리 자료집으로 간행된 이 생활사 보고가 최근 미술사학계로부터 다시 주목 받고있다. 회화사 연구자인 강관식 한성대 교수가 최근 한국학 중앙 연구원이 추진중인 조선 후기 생활사 연구 사업의 하나로 일기를 분석한 해제논문 ‘조선후기 지식인의 회화 경험과 인식’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특히 논문은 그림 관람과 수집을 유달리 즐겨한 황윤석이 당시 선비들의 미술품 거래와 감상, 선물 풍습, 서화 동네 동정에 대해 남긴 기록들을 다수 소개하고 있다.

우선 주목되는 것은 18세기 진경산수의 거장 겸재 정선이 명문 집안의 사대부라는 증언과 천문 역술 등의 지식을 인정받아 날씨·천문 기관인 관상감의 천문학 겸교수를 지냈다는 사실이다. 서울 장동 일대(청운동)에서 겸재와 이웃해 살며 그를 후원한 안동 김씨 가문의 지식인이자 황윤석의 스승이던 김용겸이 증언자로 지목된다. “겸재는 명문 고족 출신의 유학자이며 천문과 역법, 회화에 널리 통해 일찍이 천문학 겸교수로 임명되어 중인들을 가르쳤다”는 김용겸의 말은 학계 일부에서 줄곧 제기된 겸재의 중인 신분 논란을 종식시킬 수 있는 대목이다. 일기는 또 이율곡의 모친으로 저명화가였던 신사임당의 후손 이선해와 대화한 내용도 다루면서 “부인이 장성한 뒤 그림을 그리려 하지 않아 진본이 매우 적으며 딸 이매창의 그림을 부인 그림으로 잘못 아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전하고 있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그가 하급관리로 재직할 때 그림을 사거나 증정 받은 정황들을 숱하게 기록했다는 점이다. 사군자 그림을 잘 그린 유덕장의 설죽 대폭 그림을 6전에 사거나, 친한 선배로부터 홍득원의 매화그림 8첩을 1냥에 사라고 권유받았으나 돈이 없어 못샀다는 등의 술회가 보인다. 18세기 말 쌀값이 1되에 1전4푼으로 추산되어 유덕장의 설죽도 그림 값은 쌀 1말의 3분의 1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쌌다는 얘기다. 즉 3천전을 호가했던 단원, 겸재 같은 극소수 말고는 대다수 화가들 그림값이 매우 쌌다는 방증이라는 것이다. 또 친구들과 숱하게 그림들을 감상하고, 증정, 매매 행위를 한 곳이 사랑방, 관아, 서원이라는 기록을 남겨 실제 이곳이 미술시장 구실을 했다는 추정도 가능하게 한다. 강 교수는 “오지인 영월에서 서양화 족자를 구하고, 유명작가 수묵화까지 얻어 표구했다는 기록 등은 당시도 미술유통망이 지방마다 형성되어 회화 경험과 인식이 다채롭게 진행되었음을 보여주는 근거”라고 말했다. 이 논문은 국어학, 경제, 교육 등 다른 7개 분야 연구자들의 일기 해제글들과 함께 묶여 11월 정식 출간될 예정이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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