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5.05.03 20:48 수정 : 2005.05.03 20:48


△ 1946년 2월 시작된 극동군사재판은 2년여 동안의 심리를 거쳐 1948년 11월, 도조 히데키 등 에이(A)급 전범들에게 사형 등의 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이 재판 이후에도 일본의 전쟁범죄 및 침략행위에 대한 ‘역사의 판결’은 완결되지 못했다. 사진은 도쿄재판 또는 도쿄전범재판이라고도 불리는 이 재판의 심리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⑪ 도쿄전범재판

“지도자에 형사책임 물을 길 열었다”
미, 일 쉽게 점령하려 천황 면죄 시도
동아시아 대신 미·영 피해 중심 진행 비판

한·중 안다루고 일, 재판 정당성 부정

국사 중심의 현행 중학교 역사교과 과정에 도쿄전범재판의 자리는 없다. 이는 한국과 중국이 마찬가지다. 1945년 8월15일에 대한 역사 서술(<한겨레> 27일치 6면, 10회 참조) 이후, 한국과 중국의 역사교과서는 각 나라 내부에만 집중한다. 도쿄재판은 일본 역사교과서에만 등장하는 사건이다.

그러나 한·중·일이 함께 쓴 <미래를 여는 역사>는 이 도쿄재판 관련 서술에만 4쪽을 할애하고 있다. ‘일본의 과거청산’을 다루는 장에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1951년)과 함께 도쿄재판이 등장한다. 그 서술 내용을 살펴보면, <미래를 여는 역사>가 도쿄재판을 비중있게 적어 내려간 이유가 그대로 드러난다.

<미래를 여는 역사>는 ‘재판된 것’과 ‘재판되지 않은 것’을 분리했다. 일본군의 고문·강간, 난징대학살, 포로학대 등의 전쟁범죄가 도쿄재판을 통해 밝혀졌다. 도조 히데키, 이타가키 세이시로, 마쓰이 이와네 등 7명에게 사형이 선고됐다.

도쿄재판의 국제법적 의미도 가볍지 않다. “1차 세계대전까지는 전승국이 패전국에게 배상금과 영토할양 등을 요구했으며 그것이 다음 전쟁의 불씨가 됐”기 때문에, “국제재판을 통해 전쟁범죄와 인도·평화에 대한 죄를 따져 국가 지도자의 형사책임을 물을 수 있는 길을 열”었다는 배경을 적었다. A급 전범에 대한 도쿄재판과 함께 B·C급 전범에 대한 재판도 함께 소개했으며, 도쿄재판의 ‘선례’가 됐던 뉘른베르크 재판의 의미도 짚었다.


그러나 <미래를 여는 역사>는 그 한계도 분명히 지적한다. 처음부터 재판정에 오르지 않은 전쟁책임자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은 천황을 이용해 일본을 무리없이 점령하려는 방침에 따라 천황 측근 및 정치가와 손을 잡고 쇼와 천황의 면죄를 꾀했다”고 공동교과서는 적었다. 특히 “미·영과의 전쟁에 중점을 둬 식민지였던 조선·타이완 등은 다루지 않았고 … 아시아에 대한 전쟁책임은 극히 애매하게 처리됐다.”

미·영에 대한 일본의 ‘책임’을 일부 묻긴 했지만, 정작 일본이 반세기에 걸쳐 동아시아에서 자행한 침략에 대해선 눈감았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군위안부 문제 등은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고, 731부대와 화학전 책임자도 면책됐다. 사형선고된 7명 외의 A급 전범 18명은 모두 석방됐고, 다른 전범용의자들도 마찬가지였다. A급 전범이었으나 석방된 기시 노부스케는 나중에 일본 수상이 됐다.

도쿄재판이 전후 동아시아 현대사를 이해하는 중대한 사건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도쿄재판을 통해 드러난 전쟁범죄의 실체조차 부정하려는 시도와, 도쿄재판의 ‘한계’를 넘어 전쟁범죄의 뿌리를 뽑으려는 노력 사이의 긴장이 지금까지도 계속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긴장은 현행 일본 교과서에서 가장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도쿄서적판 역사 교과서는 “전쟁책임이 인정된 군인이나 정치가는 국제군사재판(도쿄재판)에 회부됐고, 전쟁중 주요한 지위에 있었던 사람은 공직에서 추방됐다”고 간략히 적고 있다. 여기에는 ‘전쟁범죄’라는 개념은 등장하지 않고, 누가 전범으로 재판받았는지 등에 대한 언급도 없다. 일본 중학생들의 절반 정도가 읽는 이 교과서에서 도쿄재판은 ‘무색무취’의 사건이다.

후소사판 역사교과서는 아예 도쿄재판을 ‘덧칠’한다. 이 교과서는 2쪽에 걸쳐 도쿄재판을 비교적 상세히 다뤘는데, 그 대부분이 재판의 부당성에 대한 서술이다. “도쿄재판이 자국의 전쟁에 대한 일본인의 죄악감을 키웠다”는 것이다. “‘평화에 대한 죄’로 국가지도자를 벌하는 것은 국제법 역사에 없던 일”이라는 논리도 펼쳤다.

떳떳치 못한 기억을 아예 외면하려는 도쿄서적판 교과서나 그 기억을 교묘한 논리로 뒤틀려는 후소사판 교과서 모두, 도쿄재판의 실체를 덮고 전후 역사를 말하고 있는 셈이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A급 전범이 총리로, 주류로 책임자 처벌 미흡등 한계


▲ 김성보 연세대 사학과 교수
도쿄전범재판의 정당성과 의의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논란이 이어져왔다. 한편에서는 이 재판의 정당성 자체를 부인하려고 하며, 다른 한편에서는 그 의의를 인정하면서도 여러 가지 한계점을 지적하고 있다.

도쿄전범재판의 정당성 자체를 부정하고자 하는 쪽은 일본의 보수 우익이다.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쓰는 모임’의 니시베 쓰쓰무는 <국민의 도덕>이란 책에서 도쿄전범재판은 “법률적 재판이 아니라 본보기 또는 복수”에 지나지 않는 재판극이었다고 단정한다. 전쟁에서 민간인을 살해하고 학대하지 않은 국가는 하나도 없는데, 오직 패전국 독일과 일본만이 평화와 인도를 위배했다고 심판받은 것은 억울하다는 심리가 깔려있다. 일본의 우익이 더욱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부분은 승자의 재판에 불과한 도쿄전범재판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생각이 역사 교과서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 일본의 침략과 전쟁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도쿄전범재판사관’을 주입하여 일본인들이 자신감을 잃고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게 됐다는 불만이다.

반면에 일본의 침략을 받았던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들은 도쿄전범재판의 한계를 강조한다.

첫째, 전쟁의 최고 책임자인 천황을 비롯해 전쟁에 앞장섰던 수많은 일본의 정치인, 관료, 기업인들이 처벌받지 않았다. 주로 육군 지휘자들만 전쟁 책임을 뒤집어쓰고 그 외의 인물들은 살아남아 미국의 의도대로 일본을 아시아의 반공기지로 육성하는 데 이바지했다.

둘째, 일본군 ‘위안부’의 강제동원, 생물·화학전 등 중요한 전쟁범죄들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731부대장 이시이 시로는 세균전 정보를 제공하는 댓가로 미국으로부터 면죄·방면됐다.

셋째, 만주사변 이후의 침략과 전쟁에 대해서만 책임을 물었을 뿐, 한국 등 주변 국가들에 대한 제국주의 침략 부분은 아예 재판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도쿄전범재판은 일본의 과거 청산과 평화를 존중하는 보편적 가치관의 확산에 큰 기여를 한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미국의 일방적인 영향력 아래 재판이 진행되면서 본래의 취지는 많이 퇴색했다.

전쟁 책임자 대다수는 면죄를 받았고, 1957년에 A급 전범 기시 노부스케가 총리로 오르는 등 이들은 다시 전후 일본의 주류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 그 뒤를 이은 신 보수 우익은 도쿄전범재판의 정당성 자체를 부정하면서 침략과 전쟁을 미화하고 또다시 군사대국의 길을 추구하고 있다.

도쿄전범재판은 끝난 것이 아니다. 미완으로 끝난 도쿄전범재판은 승전국의 손에 의해서가 아니라 평화와 인권을 존중하는 전 세계 민중·시민의 이름으로 재개되고 완성돼야 한다.

김성보 연세대 사학과 교수


진주만 미 기지 공격지시 체포 0순위…교수형당해

총리 도조 히데키

일본을 점령한 연합국 최고사령부가 제1호 전범체포령을 발동하면서 제일 먼저 잡아들이도록 한 인물은 도조 히데키(1884~1948)였다. 진주만의 미국 함대기지를 공격하도록 지시한 인물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도조는 1940년에 육군대신이 되어 중국침략의 확대를 주장하면서 이를 미적거리는 고노에 내각을 무너뜨렸다. 그 다음 해에 총리가 된 도조는 육군·내무대신까지 겸임하면서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도록 하여 결국 일본을 패망의 구렁텅이로 빠뜨렸다. 식민지 한국에 징병제와 학도병 지원제를 실시하게 한 인물도 도조였다.

일본이 패전하자 그는 자살을 기도했으나 죽기 전에 발견돼 병원에 실려갔다. 의사들은 애써 목숨을 구했고, 결국 도쿄전범재판에 회부돼 1948년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도조 히데키가 처형된 지 반세기가 지난 1988년, 그의 망령은 <프라이드, 운명의 순간>이란 영화에서 위대한 전쟁영웅의 모습으로 재등장했다. 이 영화의 시사회에는 “종군 위안부는 상행위였다”라는 망언으로 지탄을 받은 전 법무장관 오쿠노 세이스케를 비롯해 우익 성향의 국회의원들이 몰려 성황을 이뤘다. 도조의 손녀는 유골을 안고 시사회장에 나왔다. 일본 사회 일각의 우경화가 상상을 초월하는 지경으로까지 치닫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생체실험 자료 넘겨주고 기소대상서 면제·석방돼

731부대장 이시이 시로

연합국사령부는 1947년에 생체실험으로 악명 높은 일본군 731부대장 이시이 시로 중장을 비롯한 생체실험 관련자 전원을 전범 기소에서 면제했다. 실험 자료를 넘겨받는 조건이었다.

1892년생인 이시이는 22살에 교토대학 의학부 병리학과를 졸업한 후 군의관이 됐다가 독일에 유학해 세균과 독가스 제조법을 공부했다. 1931년에는 그의 형들과 함께 하얼빈 근처에 관동군 소속 세균연구소를 설립했다. 이 연구소가 소속된 부대가 바로 731부대, 즉 관동군 방역급수부다.

중국 작가 황허이의 저작 <도쿄 대재판>을 보면, 이시이 시로는 법정 진술을 통해 1941년 4월에 비행기 6대를 산시·허베이·산뚱·허난 변경 지대에 보내 페스트균을 살포했음을 고백했다. 그 결과 35만 명이 페스트균에 감염됐고, 사망자 수는 15만6천명이 넘었다.

연합군 사령부에 의해 석방된 이시이는 1950년, 그의 오른팔인 나이토 료이치와 함께 일본 블러드 뱅크를 오사카에서 창설했다. 전쟁 중인 한국에 혈액을 보내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블러드뱅크의 잇권을 둘러싸고 나이토 등이 득세하면서, 여기서 배제된 이시이는 불우한 말년을 보내다 1959년에 사망했다. 이 혈액은행이 오늘의 일본 녹십자다.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