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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5.10 18:39 수정 : 2005.05.10 18:39



막사발에 반해 인생을 불지폈소

올해 처음으로 무안 분청문화제를 연 정철수(59)씨는 10일 “무명 도공들의 진혼제

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정씨는 전남 무안에서 활동하는 도예인 12명과 50만원씩을 거둬 축제를 기획했다. 4~8일 무안군 청계면 월선리 예술인에서 열린 이 행사는 그야말로 ‘논두렁 축제’였다. 하지만 막사발을 직접 빚어 보이고, 흙 체험 등 내실 있는 행사로 호평을 받았다. 목포의 젊은 노래패들도 논두렁 무대에 올라 노래와 공연을 품앗이했다.

서울 태생인 정씨는 1975년 스물일곱 때 무안 몽탄면 몽강리에 가마를 걸었다. 그는 경기 여천에 도자기 취재를 나온 일본 기자의 통역을 맡아 동행했다가 도자기를 처음 만났다. 정씨는 “가마의 이글거리는 불과 흙에 반해 인생이 뒤바뀐 셈이다”고 웃었다. 이후 아예 도자기를 직접 빚는 것을 배웠던 그는 “분청에 한국인의 심성이 담겨 있다”는 생각에 끌려 무안으로 내려왔다. 당시 몽강리 점등 마을에는 옹기 굽는 가마 2기와 작업장 5군데가 남아 있었다.

무안 분청은 철분이 많은 적토로 빚은 뒤, 흰색 흙으로 분장해 제작한다. 인위적으로 꾸미지 않아 언뜻 보면 거칠게 보이지만, 질박한 정감이 묻어나면서 편안한 느낌을 준다. 일본에선 한국의 막사발을 국보로 지정할 정도로 분청사기의 예술적 가치를 높이 평가한다. 하지만 국내에선 분청사기가 도자기사에서 고유명사를 잃은 채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 정씨는 “분청 찻잔은 시간이 지날수록 차를 마신 흔적이 남아 그윽한 멋이 두고두고 우러나는 점이 독특하다”고 말했다.

정씨는 “고려가 망한 뒤 흩어졌던 강진의 도공들이 무안에 정착했던 분청사기의 시발점이 됐다”고 강조했다. 영산강 하류에 차곡차곡 쌓였던 황토로 빚은 무안 분청은 영산강 뱃길을 통해 전국에 공급됐다고 한다. 정씨는 “역사적으로 전국 분청의 60% 이상이 무안에서 생산됐다는 기록이 있다”며 “강진청자나 이천백자처럼 무안분청도 고유명사를 찾아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몽탄에서 3백여 년 된 가마터가 발견되는 등 무안 곳곳에서 가마터가 나왔다. 정씨는 “역사학계에선 분청사기의 맥이 임진왜란 때 끊겼다고 보고 있지만, 무안에선 일제시대까지 숨결이 이어졌다”고 덧붙였다. 일본 도예 전문가 야마다 만기찌로가 1930년대에 썼던 <무안귀얄>이라는 책을 최근 발견해 일제 강점기 때까지 무안이 분청사기로 흥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정씨는 30여 년 동안 몽평요를 지키고 있다. 그의 가마터는 전남의 도예인들이 대부분 거쳐가 ‘분청의 산실’로 불린다. 그는 한국예술전람회 추천작가와 한국전통예술대상전 초대작가를 지냈고, 1997년 서울 국제도예 비엔날레에서 ‘분청사기의 오늘전’에 초대받았다.

광주/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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