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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5.12 16:03 수정 : 2005.05.12 16:03

인생 이모작하는 사람들

로버트 프로스트는 틀렸다. 적어도 이제는 그렇다. 프로스트처럼 숲 속에 난 두 갈래 길 가운데 ‘가지 않은 길’에 대해 아쉬워할 필요가 없다. 젊은 시절 이런저런 이유로 포기해야했던 그 길을 다시 찾아 가면 된다. 평균 수명이 여든에 육박하는 시대. 정년퇴직을 한 뒤에도 20~30년은 거뜬히 살 수 있는 고령사회. 인생을 이모작 하자. 부지런히 노력하면 두 갈래길뿐 아니라 숲속에 또다른 세 번째 길을 찾아 떠날 수도 있다. 다섯 사람의 인생이모작 이야기가 길을 알려주리라.

“하나님이 지체장애아 주신 이유 있을 것”

양돈장 경영에서 사회복지사로 이병하씨

안성종합사회복지관 이병하(47) 부장은 바빴다. 쉼없이 사람을 만나고 전화통화를 한다. 자리에 앉자마자 전화벨이 울렸다. 수원보호관찰소에서 손님이 왔단다. 사회봉사 명령 처분을 받은 이들이 제대로 ‘봉사’하는지 보러왔다는 것이다.

“생업 때문에 다른 사람을 대신 보내 봉사활동을 시키는 경우가 다른 복지관에서 있었나 봐요.”


이 부장은 직원들에게 봉사명령을 받은 사람들도 고객으로 여기라고 자주 이야기한다. 그들을 범법자가 아니라 자원봉사자로 여기고 대하면 실제 그렇게 바뀐다고 그는 믿는다. 이 복지관에는 ‘봉사’를 인연으로 자원봉사자가 된 사람들이 더러 있다.

또다시 휴대폰이 여러 차례 울리더니 급기야 직원이 찾아왔다. 안성시에서 아동 급식시설을 둘러보러 왔다는 것이다.

“바쁘지만 날마다 기쁘고 즐겁습니다. 제가 선택한 일이고 제 꿈을 키워가는 일이거든요.”

2001년 마흔이 훨씬 넘어 사회복지사가 된 그는 장애인 공동체를 만드는 게 꿈이다. 한 때 그는 잘 나가던 농부였다. 대학 때 토목을 전공했고 수석졸업생으로 교수로부터 직장까지 소개받았지만 그는 “과수원을 제대로 해보고 싶어했던 아버지의 꿈을 이뤄 드리려고 딱 1년만 해보겠다고 뛰어든” 농사에 발목이 잡혔다. 처음 사과를 길렀지만 벌이가 시원치 않았고, 돼지를 키우며 큰 돈을 만졌다. 한 달에 1천만원 이상을 벌었고 많을 때는 2천만원의 소득을 올린 적도 있었다.

“돈은 많이 벌었지만 이게 내 삶의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위에서도 다른 일을 해보라고 자꾸 권했고요.”

교회에 다니던 그는 처음 신학을 공부해 목회자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가 다니던 평택동신장로교회 이춘수 목사의 “평범한 목회자보다 존경받는 집사나 장로가 낫지 않느냐”는 말을 듣고 깨달은 바가 있어 섬기는 삶을 살겠다고 서원했다.

“지체장애로 태어난 맏아이 생각이 나더군요. 아이 병을 고치려고 기도원과 부흥회에 다니며 울면서 기도한 적도 많았어요. 어느 순간 하나님이 제게 이 아이를 주신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게 됐습니다.”

사회복지사가 되어 힘없고 가난한 이들의 버팀목이 되기로 마음 먹었다. 돈사를 처분하고 사회복지학과에 편입했다. 낮에는 송탄공단의 공장에서 일했다. 서른일곱의 나이에 무리를 해서인지 코피를 달고 살았다.

4학년 1학기를 마치자 곧바로 취직이 됐다. 한 방송사 라디오에서 오산에 있는 신설 유료양로원 사무국장을 뽑는다는 방송을 듣고 곧바로 원서를 냈다. 사회복지 경력자 9명을 물리치고 재학생인 그가 뽑혔다. 시설 신고에서 입소자 모집까지 궂은 일을 도맡아 했고, 양로원이 문을 열자 직접 어르신들을 목욕시키고 빨래도 했다. 그는 늘 주머니에 귀이개와 손톱깎이를 갖고 다녔다.

“수십년 된 귀지를 빼어주거나 손톱을 깎아주면서 말동무가 돼 드리면 그렇게 좋아하실 수가 없어요.”

2001년 11월 장애인종합복지관으로 자리를 옮길 때 어르신들은 그가 다니는 교회에 찾아와 사무국장을 돌려달라며 ‘무력시위’까지 했다고 한다. 사회복지사로 일하며 복지를 돈벌이에 이용하는 어두운 면도 봤다. 그 모든 게 그에게는 초심을 잃지 말라는 경고로 다가온다. 그는 지금도 사무실에 가장 먼저 나온다. 냉난방을 미리 해놓으면 뒤에 오는 사람들이 보다 쾌적하게 하루를 시작하지 않을까 해서다. 요즘 그의 관심은 지역의 다양한 자원을 묶어 지역 복지네트워크를 만드는 일이다. 대학교, 지역단체, 각급 기관 등을 찾아다니느라 그는 오늘도 바쁘다.안성/권복기 기자 bokkie@hani.co.kr 사진제공 안성종합사회복지관


“번식·번식후기 50년씩 두번 살자”

인생 이모작 주창 최재천 교수

얼마 전 <당신의 인생을 이모작하라>를 펴낸 최재천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는 로버트 베머의 이야기부터 꺼냈다. 로버트 베머는 컴퓨터의 2000년 오류 가능성을 뜻하는 와이2케이(Y2K) 문제를 경고하며 1999년 한해 전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었지만, 정작 별 탈 없이 새 천년을 맞게 되자 큰 비난을 샀다. 최 교수는 “베머의 경고 덕에 늦게나마 와이2케이에 대비해 위기를 넘긴 것”이라며 “사람들이 고령화 위기론에 겁먹고 이모작 인생에 대비하길 바라고, 그래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길 간절히 바란다”고 밝혔다.

진화생물학자인 최 교수가 진단하는 고령화 위기론과 두 인생 체제의 근거는 이렇다. 현재 예측치들을 종합하면, 2020년 한국 인구는 4900만명을 정점으로 하향 곡선을 그릴 것이고, 65살 이상 노인이 15살 미만 어린이들보다 많아지는 ‘노인국’이 된다. 또 2020년이 되면 노인 부양 부담률이 20%로, 젊은이 4명이 노인 1명을 책임져야 한다.

그래서 최 교수는 “평균수명이 100살에 가까운 고령화 사회를 눈 앞에 둔 지금, 아이를 낳아 기르는 ‘번식기’와 그 이후 삶인 ‘번식후기’로 나눠 인생을 50년씩 두 번 살자”고 제안한다. “은퇴 뒤 살아야 할 기간은 이미 견디기 힘들 정도로 길어졌고, 노인도 의학 발달과 건강 관리에 힘입어 젊은이 못지 않은 체력을 갖게 된 이상, 번식기와 번식후기를 철저하게 분리해 인생을 이모작하자”는 것이다.

최 교수는 “두 인생 체제를 위해 적어도 40대 중반부터는 이모작 인생을 위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정부와 기업의 뒷받침과 사회 분위기 형성이 필수. 그는 “정부가 직접 나서 보육환경을 혁명적으로 개선한 뒤 조기 결혼과 조기 출산을 장려해야 한다”며 “출산 파업을 막기 위한 대안이자, 번식기를 일찍 마치고 번식후기를 제대로 준비하게 만드는 길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정부와 기업은 양육 부담이 큰 번식기에 충분한 소득과 복지 혜택을 보장해줘야 하고, 번식후기를 코앞에 둔 사람들에게는 재교육을 위한 시간 및 재원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글·사진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


“가장 잘 하는 일 선택 철저히 준비 대박을 기대하지 않는다”

치과의사에서 아동문학 출판가로 신형건씨

신형건(40)씨는 지금 아동문학 전문 출판사 ‘푸른책들’의 대표로 ‘이모작 인생’을 살고 있다. 서른세 살에 두번째 삶의 첫발을 내딛었으니, 비교적 이르고, 그래서 수월했을 법한 새출발이다. 출판사 대표라는 직함도 특이할 것이 없다. 하지만 ‘전직 치과의사’라는 독특한 이력을 듣고 나면 호기심이 샘솟는다. ‘왜 그 좋은 의사를 마다하고 출판사를 차렸을까?’ 그리고 아동문학 시장이 척박한 출판계에서 아동문학 전문 출판사를 옹골차게 꾸려가고 있는 그를 보면, 머릿속에 또 다른 물음표가 찍힌다. ‘어떻게 하면 저렇게 성공적인 이모작 인생을 살 수 있을까?’

신 대표는 첫번째 호기심에 대해 “내 능력을 정확히 파악한 뒤 꿈을 좇았다”고 말했다. 아동문학에 관심이 많은 문과생이었던 그는 고3 여름방학이 끝난 뒤 진로를 바꿔 경희대 치의학과에 입학했다. 그 무렵 신 대표는 ‘전공은 꿈이 아니라 직업’이라고 여길 만큼 현실적이었다. 그는 대학 졸업 뒤 예정대로 경기도 평택에서 작지만 내실있는 개인병원을 운영했지만 개원 3년 뒤부터 ‘한계’를 절감하기 시작했다. 실용적인 학문인 치의학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때 오랫동안 접어뒀던 ‘아동문학 출판인’의 꿈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3년 뒤인 1998년 그는 푸른책들을 차렸다. 미혼이라 부담은 덜 했지만, 부모·형제들은 “왜 기껏 쌓아놓은 부와 명예를 버리느냐”며 그를 뜯어 말렸다. 하지만 그는 주변의 만류에도 지난 2000년 겸업하던 병원을 접고 ‘전업 출판인’으로 삶의 방향을 완전히 틀었다.

두번째 호기심에 대한 신 대표의 대답은 명쾌했다. “가장 잘 하는 일을 선택한 뒤 철저히 준비했고, 배수의 진을 쳤다.” 신 대표가 출판사를 차릴 무렵, 그는 이미 아동문학 분야 전문가였다. 그는 대학 1학년 가을, 당시 최연소의 나이로 <아동문예>와 <새벗>을 통해 등단한 동시 작가였다. 또 출판사를 세우기 전까지 4권의 동시집을 펴냈고, 1990년대 이후 나온 출판 관련 서적을 섭렵하기도 했다. 그리고 ‘절대로 의사 가운을 다시 입지 않는다’는 각오로 하루 15시간 이상씩 출판사 일에 매달렸다.

이에 덧붙여 신 대표의 두번째 삶을 지탱해준 또 하나의 신념. 신 대표는 “이모작 인생에서 대박을 기대하지 말라”고 잘라 말했다. 푸른책들은 현재 한해 매출액 10억여원 가량의 중간 규모 출판사다. 메이저급 출판사가 되려면 최소한 한해 50억원 이상의 매출을 올려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실용서 등 ‘대박’ 책들을 출판해야 한다. 하지만 그는 “한자책 바람과, 실용서 붐 등을 미리 예상하고서도 아동문학에 충실하기 위해 영역을 확장하지 않았다”며 “문어발 식으로 아무 책이나 출간했다면 지금쯤 비전문 분야 책을 출판하다가 오히려 손실을 봤을 수도 있다”고 했다. “이모작 인생에서 대박을 꿈꾸다 낭패를 보기 십상이고, 꾸준히 준비한 뒤 시작해서 능력만큼 서서히 얻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이다.

그는 끝으로 이미 절판된 <슐리만 트로이 발굴기> 이야기를 꺼냈다. 여덟 살 때 트로이에 관한 역사책을 선물받은 뒤 제2의 인생에서 ‘트로이 발굴’의 꿈을 이룬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의 전기다. 신 대표는 “슐리만처럼 꿈을 꾸고, 또 그만큼 노력한다면 누구나 값진 이모작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격려를 덧붙였다. 글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 사진 푸른책들 제공


“사회로부터 많이 받았어요 이제 되돌려 주려합니다”

대기업 CEO에서 양재천지킴이로 박점수씨

“노란 꽃은 애기똥풀이고, 저것은 망초, 요것은 가죽나무, 이것은 갈퀴나무…. 저기 물결 이는 것 보이죠? 잉어들이 산란하는 겁니다.”

박점수(68)씨는 걸어다니는 양재천 생물도감이라 불린다. 풀, 나무, 물고기 등 양재천에 깃들여 사는 모든 생명을 꿰고 있다. 양재천사랑환경지킴이 회장인 그는 하루 4시간 가량을 양재천에서 보낸다. 아침 산책으로 하루를 양재천에서 시작하고 학생들에게 양재천 환경생태교육을 한다. 환경학자? 아니다. 그는 기업체에서 정년 퇴직한 뒤 양재천 지킴이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국가나 사회로부터 많이 받고 살았어요. 자식들도 다 키웠으니 이제 받은 것을 되돌려 줘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대기업 동화이앤씨의 최고경영자였던 박씨는 젊은 시절부터 봉사를 꿈꿨지만 바쁜 회사일 때문에 시간을 내지 못했다고 한다. 2001년 정년퇴임 뒤 월드컵 기간 동안 안내와 통역을 시작으로 자원봉사를 시작했다.

본격적인 활동은 2002년 6월, 서울 강남구 자원봉사센터에서 양재천 환경교육강사 양성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였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그는 자원봉사를 위해 10개월 동안 하루 8시간 이상 환경에 대해 공부했다.

그는 어르신들의 일자리 창출과 자원봉사를 조직하는 강남 시니어클럽 창립 멤버이기도 하다. 매주 목요일이면 복지관을 찾아 건물 청소와 장애인들이 쓰는 도구를 씻는 봉사를 한다. 시각장애인과 양재천 나들이 행사도 벌인다.

박씨는 경로당에 다니며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제2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강의도 한다. 봉사받는 노인, 특별히 하는 일 없이 남은 생을 허비하는 소비적 노인이 아니라 남을 도움으로써 아름답고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 생산적 노인이 되자고 설득한다. 강남구에 사는 3만 여명의 시니어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벌여 참여 의지를 파악한 뒤 지역별로 모임을 꾸릴 생각도 있다. 고교 교사였던 부인 김숙자씨도 학생들에게 한문과 영어를 가르치는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자원 봉사는 자신을 위한 겁니다. 베풀면 돌아오지요. 돈이 아닙니다. 삶의 기쁨과 건강을 줍니다. 친구들이 모두 저보고 무척 젊어 보인다고, 참 잘산다고 합니다.”

손자들로부터 훌륭한 일을 하려고 매일 바빴던 그런 멋진 할아버지로 기억되고 싶은 게 그의 꿈이다.글·사진 권복기 기자


“주부들이여 숨겨진 재주 찾아라”

수학교사서 주부로 다시 만화가로 박소영씨


박소영(49)씨는 요즘 온통 만화 생각 뿐이다. 설거지를 하다가도 컴퓨터 앞으로 달려가 만화를 그리고 싶을 때가 많다. 가끔 스케치북을 들고 집 부근 카페를 찾아 만화에 쓸 습작을 한다. 한 두 시간 가량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이나 생김새 등을 담고 카페를 나설 때는 뭔가를 해냈다는 생각에 가슴이 뿌듯하다.

1년 반 전만 하더라도 그는 전업주부였다. 대학 졸업 뒤 5년 간 수학교사로 일했지만 첫 아이 돌 때 그만뒀다. “아이 키우는 게 일보다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과감하게 그만뒀습니다.” 1981년 일이었다. “똑 부러지게” 살림을 하며 살았다. 아들 둘 모두 대학에 보내고 난 뒤에는 텔레비전 드라마에 빠져 사는 평범한 주부로 살았다.

2001년 어느날이었다. 맏아들이 컴퓨터를 모르면 세상에 뒤쳐진다고 배울 것을 권했다. 노력했지만 흥미가 없어 그만두자 아들은 아예 텔레비전을 없애고 컴퓨터에서 텔레비전을 볼 수 있도록 해버렸다. 하는 수 없이 컴퓨터를 접하게 됐다.

“세상이 완전히 달라져 있더군요. 컴퓨터 안에 또 하나의 새로운 세상이 있는 거예요.”

인터넷을 하게 되면서 홈페이지와 카페를 알게 됐다. 홈페이지를 만들고 싶었다. “내가 가진 것을 세상에 그냥 남기고 싶었어요.” 포토샵과 일러스트를 배우러 다녔고 캐릭터 제작을 가르치는 데도 찾아갔다.

오래 전 접어두었던 꿈이 떠올랐다. 수학교사를 할 때 수학을 만화로 만들면 좋겠다는 꿈. 공간, 입체, 미적분 같은 개념은 칠판에서 구현할 수가 없어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을까 고민했던 때가 생각났다.

인터넷을 하게 되면서 만화가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은 만화를 무척 좋아했다. 초등학교 때 본 <가련이>는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소공녀와 콩쥐팥쥐 비슷한 만화였다. 얼마 전 작고한 고우영씨의 <십팔사략>도 그가 좋아하는 만화다. 아이들에게도 <먼나라 이웃나라>같은 학습만화를 많이 사줬던 그다.

“<몬스터>나 <기생수> 같은 일본 만화를 보면서 깜짝 놀랐어요. 특히 <몬스터>에는 수술 장면이 나오는데 너무 세밀하고 자세합니다. 의사가 아니면 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일본에서는 도쿄대 법대나 의대를 나온 사람이 만화를 그리는 경우도 많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래. 나 수학선생이잖아. 수학을 만화로 그리기로 마음먹었다. 친구의 소개로 우연히 가게 된 부천주부만화대학이 전기를 마련해줬다. 조관제, 김동화, 이현세 등 말로만 듣던 만화가들로부터 배우는 만화수업은 알차고 재미있었다.

그는 졸업작품으로 오랜 꿈을 이뤘다. 피타고라스를 다룬 수학사 만화는 교수진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그 작품을 보고 선생님들이 깜짝 놀라더라구요. 연출, 글, 그림 등 만화 3요소 가운데 연출이 가장 중요하고 그다음이 글, 그림이라고 하는데 제가 연출력이 뛰어나다고 하셨어요.”

아이들이 좋아하는 문체에 재미있는 그림을 겻들여 딱딱한 수학사를 쉽고 재미있는 만화로 구현했다. 당분간은 유클리드나 프랑스의 공리주의 수학자 집단을 만든 부르바키 등에 대한 학습만화를 그릴 생각이다.

“저처럼 숨겨진 재주를 가진 주부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집에만 계시지 말고 자신의 재주를 찾아보시라고 권하고 싶어요.”

권복기 기자 bokkie@hani.co.kr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지금 이자리에 서 있기까지 모든 게 예비되어 있었다”

장학퀴즈 아나운서에서 엔지오 활동가로 김보경씨


“신기하지요. 삶은 생각대로 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세계적인 구호단체 월드비전 김보경(46) 홍보팀장. 낯이 익었다. 81년부터 <문화방송> 장학퀴즈를 진행했다고 한다. “남들이 힘들여 차린 밥상을 들고 들어가 생색내고 칭찬받는 자리”였다고 겸손해 한다.

그는 언젠가 서울 아닌 작은 도시에서 살게 되리라 생각했다. 꿈같은 그 생각은 잠재의식 속에 새겨졌는지 결혼 뒤 현실로 나타났다. 남편이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대구에서 교편을 잡은 것. 10년 넘게 즐겁게 살았다.

“저는 참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일도 하고 아이도 제 손으로 직접 키웠습니다. 그럴 수 있는 여성은 드물잖아요.” <대구문화방송>에서 프리랜서로 일하면서도 집안일까지 손수 했다. “정의나 원칙을 좋아해” 아이들은 학원에 보내지 않고 가르쳤다. 바쁜 중에도 경북대 신방과 대학원을 마칠 정도의 억척.

10년이 지나자 고향이, 뿌리가 그리웠다. 대구에도 정이 들었지만 친지나 친구 모두 서울에 있었다. 2001년 남편을 ‘격주말 부부’로 만들며 서울로 올라왔다.

2년 뒤 또 다른 ‘생각’이 이뤄졌다. 그는 “통일 문제와 엔지오에 관심이 많아 언젠가 그 일을 하고 싶다”는 소망을 품고 살았다. 이천시에 있는 청강문화산업대학에 ‘시사토론 및 작문’ 과목을 맡아 시간강사로 일할 때도 탈북자와 북한 문제를 많이 다뤘다. 사회적 비용을 한꺼번에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에 지금부터 통일에 대비해야 한다는 게 그의 믿음이다.

지난해 한 친구가 월드비전에서 홍보팀장을 뽑는다는 얘기를 전했다. 놀랍게도 월드비전이 그가 알고 있던 엔지오 활동의 ‘종합’이었다.

“선명회는 오래 전에 알고 있었는데 월드비전으로 바뀐 줄은 몰랐어요. 김혜자 선생님과 북한 감자사업 그리고 사랑의 빵 사업들을 모두 이 단체에서 하고 있었더군요. 모든 게 지금 제가 이 자리에 있기 위해 예비되어 있었다는 느낌입니다.”

고3인 맏딸에게 조금 미안하지만 그는 이전보다 바쁜 지금이 행복하다. 홍보팀은 “잡일이 많은” 부서다. 소식지를 만들고 언론사에 아쉬운 소리도 해야 한다. 외부의 자료 요청도 많다. “김혜자 선생님이나 한비야 팀장 같은 좋은 원재료”가 있어 홍보가 그리 어렵지도 않다고 한다. 힘든 점은 홍보보다 일을 우선시 하는 월드비전 분위기.

얼마 전 군산에서 도시락 사건이 났을 때 외부에서 월드비전의 모범적인 사업에 대한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지만 내부에서는 다른 단체가 잘못한 일을 딛고 우리 사업을 알려서는 안된다고 결정해 ‘홍보’를 거절하느라 애를 먹었다.

“투명하게 일 잘하는 단체를 찾아 기부하고자 하는 분들도 많아 홍보에 욕심이 나지만 묵묵히 우리 할 일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조화가 중요하겠지요.”

그는 요즘 또 다른 ‘생각’이 든다. 지난 2월 케냐에 갔을 때 한번 쯤은 이런 곳에서 봉사하며 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언젠가 기회가 되겠지요? 삶은 생각대로 살아지는 거니까요.”권복기 기자 bokkie@hani.co.kr 사진제공 월드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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