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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장은 직원들에게 봉사명령을 받은 사람들도 고객으로 여기라고 자주 이야기한다. 그들을 범법자가 아니라 자원봉사자로 여기고 대하면 실제 그렇게 바뀐다고 그는 믿는다. 이 복지관에는 ‘봉사’를 인연으로 자원봉사자가 된 사람들이 더러 있다. 또다시 휴대폰이 여러 차례 울리더니 급기야 직원이 찾아왔다. 안성시에서 아동 급식시설을 둘러보러 왔다는 것이다. “바쁘지만 날마다 기쁘고 즐겁습니다. 제가 선택한 일이고 제 꿈을 키워가는 일이거든요.” 2001년 마흔이 훨씬 넘어 사회복지사가 된 그는 장애인 공동체를 만드는 게 꿈이다. 한 때 그는 잘 나가던 농부였다. 대학 때 토목을 전공했고 수석졸업생으로 교수로부터 직장까지 소개받았지만 그는 “과수원을 제대로 해보고 싶어했던 아버지의 꿈을 이뤄 드리려고 딱 1년만 해보겠다고 뛰어든” 농사에 발목이 잡혔다. 처음 사과를 길렀지만 벌이가 시원치 않았고, 돼지를 키우며 큰 돈을 만졌다. 한 달에 1천만원 이상을 벌었고 많을 때는 2천만원의 소득을 올린 적도 있었다. “돈은 많이 벌었지만 이게 내 삶의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위에서도 다른 일을 해보라고 자꾸 권했고요.” 교회에 다니던 그는 처음 신학을 공부해 목회자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가 다니던 평택동신장로교회 이춘수 목사의 “평범한 목회자보다 존경받는 집사나 장로가 낫지 않느냐”는 말을 듣고 깨달은 바가 있어 섬기는 삶을 살겠다고 서원했다. “지체장애로 태어난 맏아이 생각이 나더군요. 아이 병을 고치려고 기도원과 부흥회에 다니며 울면서 기도한 적도 많았어요. 어느 순간 하나님이 제게 이 아이를 주신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게 됐습니다.” 사회복지사가 되어 힘없고 가난한 이들의 버팀목이 되기로 마음 먹었다. 돈사를 처분하고 사회복지학과에 편입했다. 낮에는 송탄공단의 공장에서 일했다. 서른일곱의 나이에 무리를 해서인지 코피를 달고 살았다. 4학년 1학기를 마치자 곧바로 취직이 됐다. 한 방송사 라디오에서 오산에 있는 신설 유료양로원 사무국장을 뽑는다는 방송을 듣고 곧바로 원서를 냈다. 사회복지 경력자 9명을 물리치고 재학생인 그가 뽑혔다. 시설 신고에서 입소자 모집까지 궂은 일을 도맡아 했고, 양로원이 문을 열자 직접 어르신들을 목욕시키고 빨래도 했다. 그는 늘 주머니에 귀이개와 손톱깎이를 갖고 다녔다. “수십년 된 귀지를 빼어주거나 손톱을 깎아주면서 말동무가 돼 드리면 그렇게 좋아하실 수가 없어요.” 2001년 11월 장애인종합복지관으로 자리를 옮길 때 어르신들은 그가 다니는 교회에 찾아와 사무국장을 돌려달라며 ‘무력시위’까지 했다고 한다. 사회복지사로 일하며 복지를 돈벌이에 이용하는 어두운 면도 봤다. 그 모든 게 그에게는 초심을 잃지 말라는 경고로 다가온다. 그는 지금도 사무실에 가장 먼저 나온다. 냉난방을 미리 해놓으면 뒤에 오는 사람들이 보다 쾌적하게 하루를 시작하지 않을까 해서다. 요즘 그의 관심은 지역의 다양한 자원을 묶어 지역 복지네트워크를 만드는 일이다. 대학교, 지역단체, 각급 기관 등을 찾아다니느라 그는 오늘도 바쁘다.안성/권복기 기자 bokkie@hani.co.kr 사진제공 안성종합사회복지관
“번식·번식후기 50년씩 두번 살자” 인생 이모작 주창 최재천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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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잘 하는 일 선택 철저히 준비 대박을 기대하지 않는다” 치과의사에서 아동문학 출판가로 신형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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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로부터 많이 받았어요 이제 되돌려 주려합니다” 대기업 CEO에서 양재천지킴이로 박점수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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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부들이여 숨겨진 재주 찾아라” 수학교사서 주부로 다시 만화가로 박소영씨

박소영(49)씨는 요즘 온통 만화 생각 뿐이다. 설거지를 하다가도 컴퓨터 앞으로 달려가 만화를 그리고 싶을 때가 많다. 가끔 스케치북을 들고 집 부근 카페를 찾아 만화에 쓸 습작을 한다. 한 두 시간 가량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이나 생김새 등을 담고 카페를 나설 때는 뭔가를 해냈다는 생각에 가슴이 뿌듯하다. 1년 반 전만 하더라도 그는 전업주부였다. 대학 졸업 뒤 5년 간 수학교사로 일했지만 첫 아이 돌 때 그만뒀다. “아이 키우는 게 일보다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과감하게 그만뒀습니다.” 1981년 일이었다. “똑 부러지게” 살림을 하며 살았다. 아들 둘 모두 대학에 보내고 난 뒤에는 텔레비전 드라마에 빠져 사는 평범한 주부로 살았다. 2001년 어느날이었다. 맏아들이 컴퓨터를 모르면 세상에 뒤쳐진다고 배울 것을 권했다. 노력했지만 흥미가 없어 그만두자 아들은 아예 텔레비전을 없애고 컴퓨터에서 텔레비전을 볼 수 있도록 해버렸다. 하는 수 없이 컴퓨터를 접하게 됐다. “세상이 완전히 달라져 있더군요. 컴퓨터 안에 또 하나의 새로운 세상이 있는 거예요.” 인터넷을 하게 되면서 홈페이지와 카페를 알게 됐다. 홈페이지를 만들고 싶었다. “내가 가진 것을 세상에 그냥 남기고 싶었어요.” 포토샵과 일러스트를 배우러 다녔고 캐릭터 제작을 가르치는 데도 찾아갔다. 오래 전 접어두었던 꿈이 떠올랐다. 수학교사를 할 때 수학을 만화로 만들면 좋겠다는 꿈. 공간, 입체, 미적분 같은 개념은 칠판에서 구현할 수가 없어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을까 고민했던 때가 생각났다. 인터넷을 하게 되면서 만화가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은 만화를 무척 좋아했다. 초등학교 때 본 <가련이>는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소공녀와 콩쥐팥쥐 비슷한 만화였다. 얼마 전 작고한 고우영씨의 <십팔사략>도 그가 좋아하는 만화다. 아이들에게도 <먼나라 이웃나라>같은 학습만화를 많이 사줬던 그다. “<몬스터>나 <기생수> 같은 일본 만화를 보면서 깜짝 놀랐어요. 특히 <몬스터>에는 수술 장면이 나오는데 너무 세밀하고 자세합니다. 의사가 아니면 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일본에서는 도쿄대 법대나 의대를 나온 사람이 만화를 그리는 경우도 많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래. 나 수학선생이잖아. 수학을 만화로 그리기로 마음먹었다. 친구의 소개로 우연히 가게 된 부천주부만화대학이 전기를 마련해줬다. 조관제, 김동화, 이현세 등 말로만 듣던 만화가들로부터 배우는 만화수업은 알차고 재미있었다. 그는 졸업작품으로 오랜 꿈을 이뤘다. 피타고라스를 다룬 수학사 만화는 교수진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그 작품을 보고 선생님들이 깜짝 놀라더라구요. 연출, 글, 그림 등 만화 3요소 가운데 연출이 가장 중요하고 그다음이 글, 그림이라고 하는데 제가 연출력이 뛰어나다고 하셨어요.” 아이들이 좋아하는 문체에 재미있는 그림을 겻들여 딱딱한 수학사를 쉽고 재미있는 만화로 구현했다. 당분간은 유클리드나 프랑스의 공리주의 수학자 집단을 만든 부르바키 등에 대한 학습만화를 그릴 생각이다. “저처럼 숨겨진 재주를 가진 주부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집에만 계시지 말고 자신의 재주를 찾아보시라고 권하고 싶어요.” 권복기 기자 bokkie@hani.co.kr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지금 이자리에 서 있기까지 모든 게 예비되어 있었다” 장학퀴즈 아나운서에서 엔지오 활동가로 김보경씨

“신기하지요. 삶은 생각대로 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세계적인 구호단체 월드비전 김보경(46) 홍보팀장. 낯이 익었다. 81년부터 <문화방송> 장학퀴즈를 진행했다고 한다. “남들이 힘들여 차린 밥상을 들고 들어가 생색내고 칭찬받는 자리”였다고 겸손해 한다. 그는 언젠가 서울 아닌 작은 도시에서 살게 되리라 생각했다. 꿈같은 그 생각은 잠재의식 속에 새겨졌는지 결혼 뒤 현실로 나타났다. 남편이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대구에서 교편을 잡은 것. 10년 넘게 즐겁게 살았다. “저는 참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일도 하고 아이도 제 손으로 직접 키웠습니다. 그럴 수 있는 여성은 드물잖아요.” <대구문화방송>에서 프리랜서로 일하면서도 집안일까지 손수 했다. “정의나 원칙을 좋아해” 아이들은 학원에 보내지 않고 가르쳤다. 바쁜 중에도 경북대 신방과 대학원을 마칠 정도의 억척. 10년이 지나자 고향이, 뿌리가 그리웠다. 대구에도 정이 들었지만 친지나 친구 모두 서울에 있었다. 2001년 남편을 ‘격주말 부부’로 만들며 서울로 올라왔다. 2년 뒤 또 다른 ‘생각’이 이뤄졌다. 그는 “통일 문제와 엔지오에 관심이 많아 언젠가 그 일을 하고 싶다”는 소망을 품고 살았다. 이천시에 있는 청강문화산업대학에 ‘시사토론 및 작문’ 과목을 맡아 시간강사로 일할 때도 탈북자와 북한 문제를 많이 다뤘다. 사회적 비용을 한꺼번에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에 지금부터 통일에 대비해야 한다는 게 그의 믿음이다. 지난해 한 친구가 월드비전에서 홍보팀장을 뽑는다는 얘기를 전했다. 놀랍게도 월드비전이 그가 알고 있던 엔지오 활동의 ‘종합’이었다. “선명회는 오래 전에 알고 있었는데 월드비전으로 바뀐 줄은 몰랐어요. 김혜자 선생님과 북한 감자사업 그리고 사랑의 빵 사업들을 모두 이 단체에서 하고 있었더군요. 모든 게 지금 제가 이 자리에 있기 위해 예비되어 있었다는 느낌입니다.” 고3인 맏딸에게 조금 미안하지만 그는 이전보다 바쁜 지금이 행복하다. 홍보팀은 “잡일이 많은” 부서다. 소식지를 만들고 언론사에 아쉬운 소리도 해야 한다. 외부의 자료 요청도 많다. “김혜자 선생님이나 한비야 팀장 같은 좋은 원재료”가 있어 홍보가 그리 어렵지도 않다고 한다. 힘든 점은 홍보보다 일을 우선시 하는 월드비전 분위기. 얼마 전 군산에서 도시락 사건이 났을 때 외부에서 월드비전의 모범적인 사업에 대한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지만 내부에서는 다른 단체가 잘못한 일을 딛고 우리 사업을 알려서는 안된다고 결정해 ‘홍보’를 거절하느라 애를 먹었다. “투명하게 일 잘하는 단체를 찾아 기부하고자 하는 분들도 많아 홍보에 욕심이 나지만 묵묵히 우리 할 일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조화가 중요하겠지요.” 그는 요즘 또 다른 ‘생각’이 든다. 지난 2월 케냐에 갔을 때 한번 쯤은 이런 곳에서 봉사하며 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언젠가 기회가 되겠지요? 삶은 생각대로 살아지는 거니까요.”권복기 기자 bokkie@hani.co.kr 사진제공 월드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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