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5.12 17:56
수정 : 2005.05.12 17:56
글로써 벗 모으니 즐겁지 아닌한가
선비들에게 글씨는 마음과 인격을 옮긴 그림이었다. 굽이치는 필획과 붓질을 맺고 끊는 기운 속에 인생이 아롱져있다고 믿었으니 글씨를 수양 방편으로는 삼되 내보이기를 꺼렸다. 서울 인사동 명소인 서당 이문학회의 수장이자 큰 선비로 추앙 받는 한학자 노촌 이구영(85)씨는 최근 이처럼 평생 새겨온 글씨의 법도를 깼다. 11일 서울 인사동 시선갤러리에서 개막한 그의 글씨전 ‘글로써 벗을 모으고’는 평생 한학과 사회변혁이란 화두를 놓고 분투해온 지식인의 굴곡진 삶을 글씨로써 회고하고 있다. 시장판처럼 변한 인사동에서 서당을 운영하며 묵묵히 후학들을 키워온 이 노학자는 함께 낸 묵첩에서 “어리석은 책상물림 한 사람이 세상에 왔다 간 표적을 남기고자 과욕을 부렸다”고 썼다.
전시장에는 평소 지인들에게 써준 경구와 자작시조 병풍 글씨, 제천 의병 사당인 숭의사와 월악산성 현판 등 약 100점의 글씨들이 나왔다. 노촌은 이념에 얼룩진 현대사 풍상을 몸소 겪었다. 일제 말 항일운동으로 투옥됐고, 광복 뒤 사회주의 운동에 가담했다 월북했으며 한국전쟁 뒤 남파되었다가 잡혀 22년간 옥고를 치른다. 출소 뒤 ‘글로써 벗을 모은다’는 이문학회를 만들어 한학에 매진해온 세월 또한 20년을 넘겼다. 그 세월의 지층이 새겨진, 근엄한 구양순체의 여러 글씨들은 글자 품이 넉넉하되 흐물하지 않고, 간간이 결기를 내뿜는다. 말은 더디게, 실천은 민첩하게 하라는 ‘눌언민행’(訥言敏行), 책에서 만난 벗을 뜻하는 ‘독서상우’(讀書尙友), 다툼 없이 이기는 게 최선이라는 ‘불쟁선승’(不爭善勝) 등에서 원숙한 삶의 지혜와 인문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서예가 김충현, 한학자 이가원,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의 글씨도 곁들여졌다. 17일까지. (02)732-6621, 732-8269.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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