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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보 1장으로 13시간 40분 연주, 에리크 사티의 <짜증> |
공연 칼럼니스트 노승림씨가 무대 예술 전반에 걸쳐 주요 작품과 예술가의 흥미로운 뒷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클래식 음악은 지루하다. 현대음악은 어렵기까지 하다. 많은 이들이 이런 편견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바로 그 클래식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이들조차 일부 그런 생각을 한다. 그런 사람들 덕분에 크로스오버니 뉴에이지니하는 이종교배 장르가 등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다수의 음악가들은 자신의 종목을 바꾸기보다는 대중에게 종목을 이해시키는 방법을 택한다. 카라얀과 쌍벽을 이루었던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이 그러했다. 그가 뉴욕필과 진행했던 ‘청소년 음악회’는 당대 미국 클래식 애호가층을 넓히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는 클래식 음악의 특별히 ‘재미있는’ 부분을 부각시키는 전략을 구사했다.
레너드 번스타인의 대중친화론은 클래식 음악의 정체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맨 처음, 대중을 위로하기 위해 생겨난 바로 그 음악이, 몇백년의 세월을 거치는 동안 대중 위에 군림하고 대중을 무시하다가 결국 대중이 외면하는 음악으로 변질된 탓이다. 아무도 듣지 않는 음악은 의미가 없음을, 자본주의 시대의 도래와 더불어 음악가들은 서서히 깨닫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음악은 여전히 대중의 이해력 바깥에 버티고 서서 고집을 피우고 있다. 20세기 초 프랑스 작곡가 에리크 사티는 현대음악의 안이하고 대중을 무시하는 모습에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는 현대음악의 몰락을 예견하고 그 이유를 역설적으로 제시하는, <짜증>이라는 해학적인 작품을 남겼다. 클래식 음악사상 가장 긴 러닝타임을 보유하고 있는 이 피아노곡은 한 번 연주하는데 무려 13시간 40분이 소요된다. 악보는 단 한장. 그 악보에는 어떤 멜로디를 제시하고 640번 똑같이 반복하라고 지시되어 있다.
작곡가가 죽은 지 24년 뒤에 발견된 이 악보는 피아니스트 4명의 릴레이 연주로 초연되었다. 워낙 기괴한 발상의 작품인지라 정식 콘서트홀에서보다는 기네스북 기록용 진귀한 이벤트 무대에서 더 인기가 좋다. 일본에서는 다카시 유지라는 피아니스트가 10시간이 넘는 왕복 야간열차 안에서 단독으로 완주했다. 우리나라에서는 1995년 서울대 학생식당에서 무려 40여명의 음대생이 동원된 가운데 초연됐다.
농담인지 실제인지 모를 에피소드도 전해진다. 어느 피아니스트가 이 작품의 완주를 시도했다. 객석을 꽉 채웠던 관중은 멜로디가 반복되는 동안 하나 둘 자리를 떴고 마지막 640번째 반복이 끝났을 때에는 십여명만이 남아 있었다. 관객도 연주가도 완전히 탈진하였지만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는 뿌듯함과 개운함에 박수를 쳤다. 그러나 맨 앞자리에 앉아 공연을 지켜보던 열혈관객의 외침에 그만 모두 경악하고 말았다. 그는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앙코르! 앙코르!”
공연 칼럼니스트/성남문화재단 홍보부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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