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5.18 21:50
수정 : 2005.05.18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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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문영/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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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허문영씨와 드라마 작가 인정옥씨가 격주로 번갈아 가며 ‘대중문화 읽기’를 합니다.
모두 칸에 가고 싶어한다. “칸은 시네필의 천국이다. 나는 데뷔작을 들고 칸에 오고 싶었고, 황금종려상을 받고 싶었으며, 심사위원장이 되고 싶었는데, 그 꿈을 모두 이뤘다”고 쿠엔틴 타란티노는 즐거워했다. 임권택 감독 영화를 제작해온 이태원 태흥영화사 사장은 “레드 카펫을 밟을 때까진 영화 해야지”라고 입버릇처럼 말했었고 칸에 무관심할 것 같은 김상진 감독도 “언젠가 코미디로 칸에 가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렇게 말하지 않는 사람들도 대부분 가고 싶어한다. 믿어지지 않지만 매년 300~500명의 한국인이 칸영화제에 간다.
하지만 순박한 영화광에게라면 칸은 권하기 망설여진다. 프랑스 감독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칸은 영화를 보여주기엔 가장 좋은 곳이지만, 영화를 보기에는 가장 나쁜 곳”이라고 말했다. 그 곳은 “스포츠카, 비즈니스, 그리고 할리우드 스타들이 무대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달시 파켓) 곳이기 때문이며, “못말리게 장중하고 구제불능으로 들떠있는”(짐 호버만) 곳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귀족문화도 거슬린다. 공식 부문과 비공식 부문은 확실히 서열화돼 있고, 공식 부문 내에서도 경쟁부문과 비경쟁부문의 대우 차이가 크다. 경쟁부문에 들면 첫 상영 때 고급 승용차 5대 안팎이 주연 배우와 감독 제작자 등에게 주어져, 레드 카펫 앞으로 모셔진다. 노동자의 가난과 고통을 그린 사회주의자 켄 로치도, 중국 인민의 절망을 번민하던 지아장커도 이 차를 타고와 나비넥타이를 메고 레드 카펫을 밟아야 한다. 이 혜택은 같은 공식부문이라도 ‘주목할만한 시선’ 부문에는 주어지지 않는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닐 것이다. 2002년, 오랜만에 칸을 찾은 장 뤽 고다르는 이렇게 회고했다. “오늘날 칸영화제는 내가 처음 왔을 때인 1950년대와는 딴판이다. 당시 한 미국인이 자크 로지에 감독과 함께 영화필름을 메고 영사실로 운반하는 모습을 봤는데 그 미국인이 바로 잭 니콜슨이었다. 이렇게 필름을 옮기는 풍경은 영영 사라져버렸다. 그건 어린 시절의 향수 비슷한 것이다.” 5월혁명이 벌어지고 있던 1968년의 칸에선 고다르가 노동자의 현실과 투쟁을 담아내지 못하는 영화인의 반성을 촉구하는 연설을 했고, 그와 동료들이 영화제를 중단시키는 사건도 있었다. 오늘의 칸을 보면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티에리 프레모 집행위원장은 올해 칸에 1600여편이 지원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 수치는 3년 전의 배다. 이상한 일이다. 영화산업의 규모는 비약적으로 커졌지만, 영화문화는 1960년대에 비할 수 없이 후퇴하고 있으며, 전세계적으로 영화광 문화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그런데 영화광의 축제라는 영화제가 왜 현기증 나게 커지고 있을까.
칸의 제1 번성 요인은 마켓이다. 칸 마켓은 세계 최대 규모다. 주상영관에서 50여편의 공식 부문 영화들이 상영되고 있을 때, 그 옆에선 전세계에서 온 600여편의 영화가 마켓에서 상영되고 있으며, 수천명의 영화 수입 배급업자들이 거리를 메운다. 베니스와 베를린이 최근 10년 동안 정체하거나 퇴조의 조짐을 보이는 것도 그만한 마켓이 없기 때문이다. 마켓의 위력 때문에 칸을 싫어하는 거장도 칸을 외면하지 못한다. 켄 로치도 그래서 어색한 표정으로 레드 카펫을 밟는다. 그러나 마켓이 중요해지는 순간, 영화제는 취향의 보존을 멈추고 크기와 이벤트에 몰두하며, 영화광은 주변으로 밀려난다.
칸은 비틀거리고 있다. 티에리 프레모는 “작년의 선정작들이 절충적이었다면 올해는 작가주의적이다”라고 말했다. 이건 놀라운 말이다. 선정 기준이 그때그때 다르다는 말은, 세계 최고의 영화제 책임자가 할 소리가 아니다. 그는 작년에 “작가주의 영화에 사람들이 지쳐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줏대없음을 대놓고 흉볼 수만은 없다. 시장과 손잡는 순간 규모의 경쟁은 거부할 수 없는 행동 원리가 된다. 그러나 규모 때문에 취향을 버리는 순간 영화제는 사라지고 시장만 남는다. 난감한 균형 잡기다. 시장가치로부터의 자유를 위해 만들어진 영화제가 시장을 불러들이면서 벌이는 곡예는 실은 모든 메이저 영화제의 팔자 같은 것이다. 하긴 어디 영화제만 그렇겠는가.
허문영/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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