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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서 온 글꼴 디자이너 조시 “말과 글자는 우리 삶의 모든 요소들이 층층이 스며든 덩어리입니다. 사용 언어만 22개에, 고유 글자도 10종류나 되는 인도 땅에서 굳이 현지 문자 디자인을 붙들고 씨름해온 건 다양한 언어야말로 인도의 문화적 정체성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인도에서 온 타이포그래피(글자꼴 디자인) 디자이너 R.K 조시(67)는, 그를 초청한 안상수 홍대 교수의 말을 빌리면 “동양의 철학적 사유로 글꼴 디자인을 업그레이드 시킨 현자”다. 최근 메타 디자인 포럼 강연을 위해 방한한 그는 “디자이너는 창조물 뿐 아니라 사라지는 것들도 눈여겨보아야 한다”며 “갈대펜으로 썼던 데바나가리(인도 고유 글자)의 유려한 서체 미학을 부활시키는 것이 내 소명”이라고 말했다. 인도 뭄바이에서 작업중인 조시는 대학 졸업 뒤부터 40년 가까이 데바나가리 같은 고유 글자의 글꼴 디자인 작업에 전념해 왔다. 고대 산스크리트 문자에서 파생한 인도의 고유 글자들은 공용글자인 힌디글자를 비롯한 오리야, 구루무키, 구자라티, 마라티, 타밀, 말라야람 등 다기한 가지를 치고 있다. 가장 많은 언어가 공존하는 나라인 인도에서 이처럼 현지 글자꼴을 일일이 현대적으로 디자인하는 작업은 지독한 인내와 고민이 필요하다고 한다. 영어 알파벳 일색이었던 현지 광고나 인쇄물 등의 타이포그라피 아성을 뚫어야하는 작업이기에 더욱 그랬다. 그는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대중의 무관심과 전문 교육 부족 등의 난제와 맞서 싸워야 했지요. 지금도 다른 디자이너들은 ‘시장성이 없다’는 이유로 고유 글자 디자인을 팽개치고, 알파벳 작업에 매달리고 있고, 글자 디자인 교육도 여전히 영어 중심으로 진행되는 상황입니다.”
그는 85년 글자꼴(폰트) 디자인 ‘비샤카’를 내놓아 명성을 얻기 시작했고, 마라티, 산스크리트, 힌디어를 포괄한 데바나가리 문자와 벵갈리, 타밀 글자의 폰트를 기획해 우리가 바탕체 쓰듯 각지에 보급하는 데 성공했다. 자기 부인의 이름을 따서 내어놓은 고유 폰트 ‘망갈체’는 현재 각종 공문서 등에 두루 쓰이고 있고, 마이크로 소프트나 리눅스 시스템의 기본 글꼴로 등록 되는 성과를 얻었다고 한다. “최소한 2~3개 언어와 글자를 써야하는 인도의 언어 환경은 오히려 도전의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지역 글자가 디자인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미미하다지만 인도인의 5%만이 영어를 할 줄 알아요. 시장성은 가진 이들의 관점일 뿐입니다. 다중언어적인 인도 문화의 잠재력은 지역 언어와 글자의 사용에서 출발하는 겁니다.” 조시는 최근 바뀐 <한겨레> 글꼴에 대해 “타이포 디자이너는 다른 나라 글자에 논평하지 않는 법”이라며 픽 웃더니 “글자체가 날씬해 보기 편하고, 지면 전체의 농도가 적당해 보인다”고 평했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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