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5.25 21:01
수정 : 2005.05.25 21:01
(19) 김홍도의 행려풍속도병
18세기의 조선시대 후기는 우리 전통문화가 한껏 무르익었던 시기다. 우리 것, 우리 땅에 대한 주체적 자부심을 바탕으로 이른바 ‘진경문화’를 난만하게 꽃피웠던 그 시절 보통 조선 사람들의 삶과 욕망들은 어떤 얼개를 띠고 있었을까. 당대의 걸출한 천재 화가인 단원 김홍도(1745~?)의 ‘행려풍속도병’ 8폭(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은 당대 생활상과 욕망에 대한 가장 ‘리얼한’ 사료들 가운데 하나다. 이 풍속도병은 1778년 34살 때 그린 8장의 비단그림 안에 산천을 유람하는 풍류객의 눈에 비친 곳곳의 양반, 서민들의 세태 풍속을 르포 하듯 담고 있다.
보통 일반인들은 단원의 풍속도하면 씨름판, 서당 모습, 춤추는 무동 등을 담은 <속화첩>(역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을 떠올린다. 하지만 상당수 미술사가들은 서민 감상용으로 장지에 속필로 그린 <속화첩>보다는 비단 위에 훨씬 세밀한 선으로 기품 있게 그린 ‘행려풍속도병’을 높이 친다. 단원의 그림 스승이자 예술계 대부였던 표암 강세황(1713~1791)이 이례적으로 그림마다 익살스런 평을 달아 놓았기 때문이다. 그 중 하나인 <파안흥취>를 보자.
말 타고 언덕길을 내려오던 초라한 선비가 목화를 따는 시골 처녀들의 몸매를, 부채로 얼굴 가리고 지그시 곁눈질한다. 그를 따르는 시종 아이도 주인을 따라 슬그머니 눈짓한다. 대충 상황은 짐작이 가나 상세한 그림 속 사정은 강세황이 화폭 위쪽에 평한 글에서 알 수 있다. ‘해진 안장에 비루먹은 말 타고 가는 나그네/행색이 심히 초라하건만/무슨 흥취가 있다고/목화 따는 시골 아낙네를 쳐다보는고?’
<취중송사>는 아예 ‘개그 콘서트’ 같은 분위기다. 마을을 행차하는 원님 앞에 난데 없이 술취한 시골사람 둘이 넙죽 엎드려 즉석에서 상대방을 고소하는 해프닝을 벌인다. 삿갓 비뚜루 맨 아전은 당황한 듯 땅바닥에 넙죽 엎드려 이들 말을 고소장에 옮겨 쓰는 진풍경이 펼쳐지건만 원님은 거드름만 피운다. 표암의 글이 또한 재미있다. ‘…시골 사람 와서 고소 하니/형리가 고소장을 쓰네/시골 사람 술 취해 부르는 대로, 형리가 쓰니/잘못된 판결을 하면 어찌할꼬?’
기러기 날아오는 새벽 광주리, 항아리 들고 어촌의 포구를 떠나는 아낙들을 그린 <매염파행>에서는 표암의 글맛이 일품이다. ‘밤, 게, 새우, 소금/광주리와 항아리에 가득 채우네… 한번 펼쳐 냄새 맡으니/바람 결에 날리는 그 비린내가 코를 찌르는구나’ 어촌 사람들의 질박한 생활상이 항아리와 비린내라는 표제어로 생생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회화적으로도 행려풍속도병은 서민들의 생활행위만을 부각시킨 <속화첩>에 비해 안개 낀 산하나 기러기 날아오는 포구 등 아련한 산수 풍경이 같이 어우러져 담박한 시정을 보여준다. 원래 중국과 조선에서는 선비들이 산수풍경에 시를 덧붙이는 제화시의 전통이 있었는데, 이 행려풍속도병은 세속적 풍속도에 오히려 선비의 해학적 세태평을 덧붙였다. 술기운 날리며 우스개 지어가며 그림 그렸다는 단원의 해학성이 표암의 익살 어린 성품과 맞닿아있음을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는 셈이다.
표암과 단원은 호랑이 그림을 합작해 그리는 등 신분을 초월한 스승-동료의 인연을 우리 미술사에 아로새겼다. 표암은 단원이 7, 8살 코흘리개 시절부터 그림스승을 자처했다. 30년 이상의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궁중에 음식을 대는 사포서에서 같은 직장동료로 지냈으며 노년에는 친구 같은 사이가 되었다. 단원을 ‘그림의 모든 분야에서 묘품을 보인 신필’로 격찬했던 표암은 “단원과 관청에서 아침 저녁으로 같이 거처했으며 나중에는 예술계에서 나이를 잊고 지내는 벗이 되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신분과 인맥의 벽을 벗어나 재능과 자질을 인정하는 데 귀천을 가리지 않았던 조선 후기 예인들의 진취성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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