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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를 드러내는 과정이었다. 4년에 걸친 <미래를 여는 역사> 집필의 핵심은 한·중·일 세 나라 역사인식의 차이를 그대로 드러내는 데서 시작했다. 자국사 극복을 중시하며 열린 자세로 참가한 각 나라 집필위원들조차도 격론을 거듭했다. 몇몇 쟁점은 끝내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미래의 과제로 남겨졌다. <미래를 여는 역사> 한·중·일 공동역사편찬위원회는 26일, 치열했던 격론의 과정과 내용을 공개했다. 집필위원인 김성보 연세대 교수는 “기본적인 역사인식을 공유하면서 출발했지만, 진행과정에서 다양한 쟁점이 등장했다”며 “서로 다른 입장을 ‘병기’하지 않고, ‘합의’된 내용을 공동교과서에 서술하는 데 주력했다”고 말했다. 근현대 시기구분등 20여개 쟁점 격론 다른 입장 ‘병기’보다 역사인식 공유 중점 “합의 못이른 대목은 한계 아닌 과제”
편찬위원회가 공개한 쟁점은 20여개에 이른다. 대표적인 것이 동아시아 근현대사 시기 구분이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청일·러일 전쟁 등을 중심으로 동아시아의 전근대와 근현대를 구분할 것을 주장했다. 집필위원인 왕현종 연세대 교수는 “일본의 이런 주장은 일본이 주도한 동아시아의 ‘근대’가 잘못된 것이었고, 이를 극복해야 한다는 비판의식이 포함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일본 중심의 역사서술에 대한 한국·중국의 반론이 거셌다. 결국 세 나라 각각의 근대국가 건설 과정과 일제의 침략전쟁을 함께 고려해 시기를 구분했다. 중국과 한국의 관계도 논란거리였다. 한국은 개항기 청나라의 외압을 서술하려 했지만, 중국 집필위원들은 “일본의 침략과는 전혀 다르다”고 주장했다. 토론 끝에 교과서에는 청나라의 외압을 역사적 사실로 서술하되, 그 성격이 ‘제국주의’적이었는지는 향후 논의 과제로 남겼다. 한국인들에게는 ‘상식’으로 통하는 3·1운동과 5·4운동의 관계도 쟁점이었다. 한국 집필위원들은 3·1운동이 5·4운동에 큰 영향을 줬다는 입장이었지만, 중국 쪽은 “그런 이야기 자체를 처음 듣는다”며 난색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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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의 원인에 대해서는 중국과 일본이 맞섰다. ‘노구교 사건’의 주역이 누구였는지가 문제였다. 중국 쪽은 “일본군이 먼저 도발했다”고 주장했지만, 일본 쪽은 “누가 먼저 사건을 일으켰는지는 아직 분명히 확인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역사적 근거’에 대한 엇갈린 주장은 일본의 중국침략과 가해 사실에 대한 서술에서도 등장했다. 중국 쪽은 현행 중국 교과서에 등장하는 방대한 분량의 통계와 사례를 통해 일본군의 만행을 적어야 한다는 입장이었지만, 일본은 “명확히 입증할 수 있는 사실만 기록해야 한다”고 맞섰다. 일본의 동아시아 침략 사실에 대해 비교적 수세적이었던 일본 쪽 집필위원들은 ‘내셔널리즘’에 대해서는 목소리를 높였다. 일본은 각 나라의 민족주의·국가주의를 넘어 세계시민을 강조하는 서술을 기본으로 하자고 주장했다. 한국·중국은 이런 취지에 공감하면서도 ‘피해자’인 한·중 내셔널리즘의 긍정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현대사와 관련해서는 동아시아 정치정세에 대한 각 나라의 입장이 미묘하게 엇갈렸다. 중국은 대만 문제의 서술 자체에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하나의 중국’만 존재한다는 게 중국의 주장이었다. 중국이 참전한 한국전쟁의 서술에 대해서도 중국 집필위원들은 부정적 반응을 보였다. 집필위원인 신주백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완전한 합의에 이르지 못한 몇몇 대목은 공동교과서의 ‘한계’가 아니라, ‘재도전의 과제’”라고 자평했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4년 대장정 돌아보면 3국 집필진 54명 11명 국제회의 한·중·일 공동 역사교과서의 첫출발은 2001년 3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일본의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후소사 교과서가 문부성 검정을 통과한 것을 계기로 한국의 50여개 시민·사회단체들이 ‘일본교과서 바로잡기 운동본부’를 결성해 ‘어린이와 교과서 전국네트워크21’ 등 일본 시민단체들과 연대해 후소사 교과서 불채택 운동을 벌였다. 후소사 교과서 채택률이 0.039%에 그쳤다. 하지만 소극적인 채택저지 운동만으로는 역사왜곡을 근본적으로 막을 수 없다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이듬해 3월 한·중·일 세 나라 역사학자와 시민단체 관계자 110여명은 중국 난징에서 ‘역사인식과 동아시아 평화포럼’이라는 학술회의를 열었다. 후소사 교과서 파동 등 일본 우익세력의 역사왜곡이 자칫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할 수 있다는 공통 인식이 이들을 한자리에 불러모았다. 닷새 동안의 학술회의 끝에 한국 쪽의 제안으로 공동 역사교과서를 발간하자는 합의가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두 달 뒤엔 ‘한·중·일 공동 역사교재개발 특별위원회’가 꾸려졌다. 그렇지만 공동 역사교과서가 나오기까지는 어렵고도 험난한 과정의 연속이었다. 2002년 8월 ‘제1차 서울국제회의’가 개최됐지만 교과서의 목차를 선정하는 데만도 1년 반이나 걸렸다. ‘국경을 넘는 역사’를 어떻게 재구성할지를 놓고 세 나라 집필위원들 간에 견해가 크게 엇갈렸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일본은 메이지유신, 청일·러일전쟁 등 일본의 주요 사건을 기준으로 시기를 구분하려 했으나, 한국은 세 나라 각각의 근대국가 건설과정과 일제의 침략전쟁이라는 상호관계를 함께 고려해 시기를 구분하자고 주장했다. 결국 한국 쪽 제안이 받아들여졌다. 특별위원회는 2003년 11월 서울회의에서 전체적인 목차와 서술 원칙에 최종 합의했다. 2004년부터 세 나라가 각각 본격적인 원고 집필에 들어갔지만, 교과서 집필 절차는 더욱 까다로웠다. 각국의 원고를 한국어·중국어·일본어로 각각 번역한 뒤 다른 나라 집필위원들에게 전달하고, 이에 대한 검토 의견서를 만들어 다른 나라 집필진에 다시 전달하고 원고를 수정하는 작업이 수차례 반복됐다. 각국의 집필진 54명은 지난달 ‘베이징 국제회의’를 마지막으로 모두 11차례의 국제회의와 수십 차례의 실무회의를 거듭하며 26일 비로소 한·중·일 공동 역사교과서를 내놨다. 그러나 동아시아 평화와 화해를 위한 4년여의 ‘대장정’은 첫 발걸음일 뿐이라고 이들은 말했다. 이호을 기자 he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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