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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6.01 16:17 수정 : 2005.06.01 16:17

롤랑 프티의 ‘??은이와 죽음’

발레 영화라고 하기에는 뭣하지만, 그래도 춤과 관련되어 우리의 뇌리에 가장 뚜렷한 기억을 남긴 영화는 아무래도 <백야>일 것이다. 반공영화로서는 보기 드물게 적당히 촌스럽고 또 유치하게 우리의 심금을 울린 바 있다. “타도 공산주의!”라는 편파적이면서도 유치한 주제를 볼 만하게 윤색시켜 준 것은 극중 삽입된 각종 음악들과 프로 댄서들의 현란한 춤이었다. 이 영화의 두 공로자를 꼽으라면 엔딩 타이틀 ‘세이유 세이미’를 노래했던 라이오넬 리치와 현역 발레리노였던 미하일 바리시니코프일 것이다.

바리시니코프는 이 영화에서 두 편의 실제 현대무용을 선보인다. 하나는 키로프 극장 무대에서 옛 연인 앞에서 비쇼츠키의 노래 ‘야생마’에 맞춰 춘 트와일라 타프의 작품이고, 또 하나는 영화의 시작을 알렸던 롤랑 프티의 <젊은이와 죽음>이다. 특히 이 <젊은이와 죽음>은 영화 세트가 아닌 실제 공연 실황이었으며 입체적인 카메라 앵글로 중요한 장면을 거의 빼놓지 않고 다 보여주어 무용 애호가들의 탄성을 자아내기도 했다.

그 자신이 현역 발레리노이기도 했던 롤랑 프티는 바로 전 회에 언급했던 니진스키, 디아길레프가 몸을 담았던 바로 그 ‘발레 뤼스’(1909년 러시아의 발레 감독 세르게이 디아길레프가 파리에 세운 프랑스 발레단)의 정통 후계자다. 지금은 안무 성격이 많이 바뀌어 예전 분위기를 많이 상실하긴 했지만, 1946년 비교적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젊은이와 죽음>은 무대디자인과 의상을 장 콕토가 직접 담당할 만큼 발레 뤼스의 영향이 여전히 드러나 있다.

전후 젊은이들의 상실감과 허무를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안무와 음악의 주종관계를 완전히 뒤집었던 파격적인 시도로도 익히 알려져 있다. 실상 이전까지 모든 무용은 음악이 먼저 정해지거나 혹은 작곡된 뒤 그 음악에 맞추어 움직임이 만들어졌던 것이 사실이다. 이는 안무가들이 음악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러나 프티는 마지막까지 작품을 위한 음악을 굳이 공개하지 않았다(실제로는 결정하지 못했다고들 한다). 댄서들은 프티가 임의로 정해준 싱코페이션 리듬의 재즈음악에 맞춰 작품을 연습할 수밖에 없다. 초연 당일날. 마지막 리허설을 앞두고 프티는 무용수들에게 돌연 바흐의 <파사칼리아>를 제시했다. 놀랍게도 프티가 안무한 동작과 바흐의 음악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무용 그 자체가 이미 독자적인 리듬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는 에피소드로, 무용이 음악에 종속되어 있는 음악이 아니라 동등한 예술임을 입증하는 대목이다.

<백야>에서 <젊은이와 죽음>을 추었던 무용수로, 노란 드레스의 발레리나도 우리는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그녀는 마리-클로드 피에트라갈라라는 무용수로 당시 파리 오페라 발레단의 프리마 발레리나로 활동하고 있었던 유명인사였다. 은퇴 후 피에트라갈라는 마르세이유 예술감독으로 임명되었지만 오래지 않아 해임되었다. 사유는 성격 파탄이었다고 한다.

노승림 공연 칼럼니스트/성남문화재단 홍보부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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