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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대립·군사독재 그늘서
제대로 ‘조명’ 못받아
3일 ‘탄생100년’ 학술대회 해방 60주년이 되도록 복원되지 못한 현대사의 인물이 적지 않다. 산수(山水) 이종률 선생(19051989)이 대표적이다. 그는 독립운동가이자 통일운동가였다. 근 한세기에 이르는 한국 현대사의 현장에 빠짐없이 등장했다. 그러나 그를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이념대립과 군사독재의 그늘이 이종률의 자취를 덮었다. ‘산수 이종률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 추진위원회’는 이를 발굴해 역사의 양지에 내놓으려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김인세 부산대 총장, 송기인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이사장, 배다지 이종률선생기념사업회 회장, 허남식 부산시장 등이 공동추진위원장이다. 오는 3일 부산 민주공원에서 그가 주창했던 ‘민족혁명·인간혁명’의 현대적 가치를 되짚는 학술대회가 이들의 주최로 열린다. 그의 사상을 조명하는 종합 학술대회는 이번이 처음이다. 4일에는 그가 교수로 재직했던 부산대에서 탄생 100돌 기념식이 열린다. 그의 삶을 일별하는 것만으로도 이종률이라는 인물의 무게를 짐작할 수 있다. 식민지 시절,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 학생단체인 공학회를 이끌었고, ‘우리말연구회 사건’ ‘조선학생 맹휴동맹 사건’ 등을 주도하며 수차례 투옥당했다. 해방 직후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반대를 주도했고, 분단 이후에는 평화통일운동을 주창했다. <민족일보> 창간을 주도했고 <부산일보> 논설위원을 역임했으며 박정희 시절에는 사형구형까지 받을 정도로 민주화운동에 족적을 남겼다. 이런 인물이 ‘역사’에 등장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종률을 연구해온 김선미 부산대 강사(역사학)는 “이 선생은 단정수립을 반대하며 이승만 정권에 맞섰던 마르크스주의자였지만 동시에 공산주의를 비판하면서 이를 극복하는 ‘용공’을 주창했다”며 “이런 점 때문에 한국사회의 좌·우 모두로부터 특별한 조명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진보당 등 사회민주주의적 흐름에 대해서도 ‘개량주의’라고 비판하며 거리를 뒀다. 이종률의 독특한 사상은 ‘민족혁명-인간혁명’으로 집약된다. 공산주의의 기계적 수용을 비판한 그는 민족혁명을 통해 봉건질서를 타파할 것을 주창했다. 이후에는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 인간혁명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김선미 강사는 “공산주의자와 친분을 유지하면서도 공산주의를 비판했고, 공산주의자라는 의혹을 받으면서도 공산주의적 정책을 수용해 공산주의를 극복하려 했던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에 대해 이종률 선생이 호감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종률의 ‘사상의 궤적’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이종률선생기념사업회 배다지 회장은 학술대회 기조발제문을 통해 “이종률 선생의 사상을 되짚어 보면서, 신자유주의의 광풍이 몰아치는 현실의 모순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역사 발전의 길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좌·우와 남·북, 식민과 탈식민의 대립구도를 넘나들었던 독특하고도 독창적인 이종률이라는 인물을 통해 2005년 한국 사회가 나아갈 길을 밝혀보겠다는 것이다. 행사문의는 (051)462-1016.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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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률 선생 연보
1905년 경북 영덕 출생(6월6일)
1925년 최초의 사회주의 학생단체인 공학회(共學會) 대표
1926년 6·10만세운동을 준비하던 중 체포돼 투옥
1927년 일본 와세다대 입학. 신간회 도쿄지회 결성 참여. 재일본 조선청년총동맹 위원
1928년 신간회 도쿄지회 간사. ‘우리말연구회 사건’으로 와세다대에서 출학 당함. 조선학생맹휴동맹사건으로 수감
1936년 형평사 운동을 배후에서 지도한 혐의로 투옥
1938년 출판법 및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공주형무소 투옥(이후 해방 때까지 보호관찰대상)
1945년 해방직후 조선학술원 서기국 상임위원
1946년 민족혁명 전위당 건설을 위한 사전조직으로 민족건양회 결성. <민주일보> 창간 주도. 편집국장과 주필 역임
1947년 민주주의독립전선 결성하고 단정수립 반대투쟁 전개
1952년 제2대 대통령선거에서 이시영 후보 선거운동을 통해 평화통일운동 전개. 부산대 정치학과 교수로 부임
1956년 제3대 대통령선거 때 평화통일론 방향의 신익희 후보진영에 참여하여 후보단일화운동 전개
1958년 자신을 찾아온 간첩 불고지죄로 투옥. <국제신보> 편집고문, <부산일보> 논설위원 역임
1960년 민주민족청년동맹 결성
1961년 <민족일보> 창간 주도
1962년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결성 주도해 군사혁명 특별재판소에서 사형 구형, 10년형 선고
1965년 형 면제로 석방
1966년 경남 양산 개운중학교 교장으로 일하며 민족교육사업 전개
1974년 뇌졸중으로 쓰러짐
1989년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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