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6.01 16:57
수정 : 2005.06.01 16:57
(20) 몽유도원도
우리 회화사에서 불세출의 걸작으로 첫 손 꼽히는 조선초 화가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모르는 이들은 거의 없다. 그러나 교과서에도 나오는 총길이 20m의 이 두루마리 그림이 왜 걸작일까 자신있게 설명할 수 있는 이들은 드물 것이다. 그림이 이웃나라 일본의 덴리대에 소장된 탓에 쉽게 감상할 수 없고, 흐릿한 사진 도판을 보며 막연히 신비감을 느껴보는 정도에 그치는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동양의 전통적 이상향 도원(복사꽃 마을)의 꿈 같은 정경을 담은 <몽유도원도>의 진가는 전통 문화의 최절정기로 손꼽히는 15세기 세종대의 문화 ‘엑기스’가 고스란히 녹아있다는 점에서 나온다. 조선초 가장 유명한 예술패트런(애호가)이지 서화수집가였던 세종의 아들 안평대군(1418~1453)과 그의 수하에 모여든 당대 최고의 문인 지식인들이 만든 전무후무한 합작품이다. 안평대군이 꿈에서 본 도원경의 절경을 그리라고 하명을 받은 화원 안견은 사흘 만에 그렸고, 여기에 안평대군의 송설체 제목 글씨와 서시, 발문, 그리고 박팽년, 성삼문, 정인지, 김종서, 최항, 신숙주, 김수온 같은 대표적 지식인 21명의 찬시가 따라붙고 있다. 이들은 20~30대 집현전 학사들이 주류이며 육진 정벌로 유명한 김종서 장군, 음악 대가 박연, 90살 고승 만우까지 참여했다. 안평대군의 발문과 박팽년의 글은 싱그러운 아취와 사색의 향기가 우러나는 백미다. 안평대군은 세종 29년(1447) 4월20일 밤 홀연히 잠들었다가 복사꽃 나무 널린 산속 도원의 마을을 박팽년과 찾아가는 꿈을 꾸었다면서 이렇게 쓰고 있다.
‘옛 사람이 ‘낮에 했던 것을 밤에 꿈꾼다’고 했는데, 궁궐에 몸을 맡겨 밤낮으로 업무에 매달렸거늘, 어찌하여 그 꿈이 산림에까지 이르게 되었을까? 내가 좋아하는 이들이 많거늘 하필 몇 사람만 도원에 따른 것인가? 생각하건대, 그 성품이 그윽하고 궁벽한 곳을 좋아하여 평소 바위와 폭포를 그리워하는 생각이 있고, 이 몇 사람과는 더불어 사귀는 도가 더욱 돈독하기 때문에 이렇게 된 듯하다…’ 이에 신하 박팽년이 정갈한 해서체로 철학적 분위기의 심오한 찬문을 내어 화답하고 있다. ‘기이한 일이로다! …무릇 형체가 비록 밖으로 사물과 만난다 하더라도, 안으로 정신이 이를 주재하지 않는다면, 또한 어찌 형체를 접할 수 있겠는가? …어찌 깨어있을 때 한 것을 진실하다고 하는 것은 옳고, 꿈에서 한 것을 진실하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겠는가? 더구나 사람이 한 세상을 살아가는 것도 하나의 꿈속과 같은 것이거늘…’ 장자의 나비의 꿈 이야기처럼 꿈과 현실을 가르지 않고, 환각 세계 속에서도 정신의 실체성을 찾으려 했던 사대부 학자의 예민한 통찰이 엿보인다. ‘도원이 꿈 속에 영혼으로 들어오고 꿈 속에 영혼이 도원으로 들어갔네’로 시작되는 무인 김종서의 찬시는 뜻밖에도 서정적 감성이 가득한데, 검법 같은 붓질이 휘날리는 힘찬 글씨체와 조화를 이룬다. 기구하게도 훗날 글 쓴 이들 중 박팽년 성삼문은 세조의 왕위 찬탈 때 사육신으로 처형당하고 정인지, 신숙주는 세조편에 붙게 되니 이 찬시들은 착잡한 감회도 느끼게 한다.
두루마리 속 본 그림은 길이가 1m도 채 안된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현실세계에서 험산준령의 통과로를 거쳐 붉은 복사꽃 핀 도원을 찾아가는 얼개인데, 구름이 뭉클뭉클 피어오르는 듯한 붓질로 기암절경의 산세를 묘사한 것은 송나라 그림대가 곽희의 필법이다. 짙은 먹과 엷은 먹을 자유자재로 부리면서 현실계를 가로막은 것으로 묘사한 중앙부의 산세 풍경이 무릉도원보다 더 압권으로 꼽힌다. 다른 중국 선경도와 달리 그림 속에 사람이 전혀 없다는 점도 더욱 신비스럽다.
몽유도원도가 일본 땅에 들어간 경위는 미술사학계의 주요한 수수께끼다. 안휘준 서울대 교수가 쓴 <안견과 몽유도원도>를 보면 그림은 19세기 말까지 일본 규슈 최남단 가고시마의 벌족인 시마즈 가문에 소장되어 있었으나 일본에 건너간 경위는 기록이 없다. 학계 일부에서는 시마즈가가 임진왜란 때 조선에 출병한 가문이며, 몽유도원도에 대한 기록이 조선 후기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임진왜란 때 약탈당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나오고 있다. 해방 직후 일본 상인들이 몽유도원도를 팔려고 한국에 들여왔으나 아무도 사려는 이가 없어 결국 덴리대로 넘어가게 되었다는 안타까운 일화도 전한다. 이 명작은 꿈결처럼 고국으로 들어왔다 다시 흘러가버린 셈이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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