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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르포] “턱 내려! 웃으란 말야!”
…쩌렁쩌렁 울리는 마이크…
살벌하네… “최대한 재수 없게 가는 거야. ‘나한테 반했냐’ 이 표정으로.” 쇼까지 4시간 남았다. 늘어진 청바지에 검은색 면티, 머리를 질끈 묶은 연출 김소연(32)씨의 미간이 한껏 좁아졌다. 지난 25일 오후 4시 서울 군자동 리틀엔젤스예술회관에서 열린 ‘제너럴 아이디어’ 디자이너 최범석(28)씨의 ‘더 다크 에이지’라는 패션쇼 리허설은 살벌했다. 이날의 주제는 중세 유럽의 전사였다. 모델들의 결기와 객기 모두 성에 안 차는지 김씨는 핏빛 벨벳이 드리워진 무대를 쏘아봤다. 혼돈, 전쟁, 평화 3부로 나뉘어 무대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첫번째 리허설의 피날레, “턱 내려, 다리 한쪽 앞으로…” 주문은 계속됐다. 한 사람씩 걸어 돌아나가는 순간 결국 호령이 떨어졌다. “여기선 웃으란 말이야!” 지었던 웃음도 달아나겠다. 까무잡잡한 화장에 길들이지 않은 듯한 매력을 끌어올린 모델들이지만 이 순간 눈빛 한 조각도 그들의 것이 아니다. 진짜 쇼에서야 오롯이 이들의 카리스마가 돋보이겠지만 지금 빛나는 건 김씨다. 장악력은 덩치가 아니라 날선 발언에서 나온다. 왜 그렇게 무섭게 하세요? 첫 번째 리허설이 끝나고 쩌렁쩌렁 울리던 마이크를 내려놓은 김씨에게 “왜 그렇게 무섭게 하느냐”라고 물었다. ‘혼돈’에선 불안과 결단이 함께 표현돼야 해요. ‘전쟁’에선 독기가 드러나야 하고요. 마지막엔 자신만만함이 살아야죠. 다들 20대 초·중반이라 인생 경험이 별로 없잖아요. 걷는 거 하나만 봐도 기분이 어떤지 알 수 있는 건데….” 주제를 잡고 난 뒤 4개월 동안 준비해 100여명이 동원돼 꾸린 패션쇼이니 대충대충은 없다. 준비 절차 등은 다른 패션쇼와 비슷하지만 장소는 성의 분위기를 살리려고 일부러 이 곳을 잡았다. 무대 뒷편 분장실, 자기 머리를 매만지는 최범석씨는 ‘악역’을 김씨에게 맡겨놓고 “손질하니까 머리가 작아 보인다”며 싱글벙글 웃었다. “같이 일 해본 모델들이라 별 걱정 없어요.” 서울 홍대 한 클럽에서 열린 지난 쇼에서 자신은 턴테이블을 돌리며 모델들은 담배 피우고, 술 먹고, 침까지 뱉게 했으니 ‘산전수전’ 같이 겪어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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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유 만만해 보이는 최씨도 그리 호락호락할 것같진 않았다. 이번 쇼의 주제에 대해 설명하는데 사뭇 거창했다. 그만큼 요구하는 것도 많을 듯하다. “자본과 기계 문명이 지배하는 사회에 매몰돼 좇아가기만 하는 모습이 보기 싫어요. 그래서 억압이 심한 중세에 거칠게 반항하는 인물을 상상해 본 거예요.” ‘막 나가는’ 전사를 그리려 군복 분위기가 나는 투박한 다지인에 완장과 깃발 무늬를 붙였다. 최씨가 설명하는 동안 그의 ‘야심 찬 전사들’ 가운데 임주현(23)씨와 이행성(21)씨는 분장실 한쪽에 앉아 깨강정을 부스럭 거리며 먹고 있었다. “주문이 일방적이니까 힘들어요. 걸으면서 느낌도 살리는 게 쉬운 일이 아니죠. 1500명씩 관객이 꽉 차고 조명 들어오면 순간 앞이 안 보여요.” 그래도 이들은 3~4년차 ‘중견’ 모델이라 여유 있는 편이다. “순간…앞이 안보여요” 1년차인 윤진구(25)씨는 연신 거울 앞을 서성거렸다. “어떻게 해요?” 스타일리스트 리밍(30)씨와 머리 손질을 마친 최씨가 다가섰다. “전쟁에서 어깨를 더 흔들어봐.” 윤씨가 터벅터벅 걸어오는데 아직도 부족한가 보다. “풀 씹는 것처럼 질겅거려 봐라. 쇼에선 진짜 껌 씹어라.”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게 그건데 이들의 신경은 발의 각도 하나하나 걸려들도록 촘촘했다. 이 까탈스러움의 끝은 어디인가? 오후 6시15분께 두 번째 리허설이 시작됐다. 무대 뒤 줄을 선 모델들에게 김씨는 다시 한번 당부했다. “눈 뒤집어도 좋아.” 손을 올려 턱에 가져가거나 주머니에 두 손을 찌르는 동작을 할 사람까지 꼼꼼하게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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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종, 말소리와 함께 이탈리아어로 중얼거림이 흘렀다. 붉은 커튼 위로 구름이 스산하게 지나가고 카톨릭 성가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거침없이 모델들이 걸어 나올 때부터는 하드록과 비트의 향연이었다. 무대를 바라보는 2층에서 ‘음악조립해체가’ 김동섭씨와 디제이 연준이 만들어내는 소리였다. “범석이랑 셋이 술 마시면서 음악가 이름을 안보고 여러 앨범을 듣고 난 뒤 좋은 것만 8~9곡 골라 섞었어요. 옛 유고슬라비아 노래도 넣었죠.” 30분전…‘서비스’ 한모금 꼴깍 정장 조끼에 청바지를 맞춘 것처럼 ‘부조화 속의 조화’로 1부가 마무리됐다. 이제 전쟁이다. 검푸른 가죽, 모피의 거친 질감이 살아났다. 골똘히 연습했던 윤씨가 어깨를 껄렁하게 휘저으며 껌을 질겅거렸다. 텅 빈 객석을 향해 쏘아보는 눈빛이 형형했다. 김씨와 최씨, 말아 쥔 흰 종이를 위로 치켜들며 연방 “좋아, 좋아”라고 외쳤다. 숨 가쁜 45분, 모델 20명이 55벌을 순식간에 갈아 입었다. 세 번째 짧은 리허설까지 마치자 이제 쇼는 30분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양주 ‘시바스 리갈’ 3병이 대기실로 들어왔다. 모델들은 한 모금씩 돌아가며 마셨다. “긴장을 풀게 하려는 거예요.” 15분 전, 문 앞엔 중세 수도승처럼 차려입은 사람들이 하나둘 촛불을 켜고 섰다. 이미 족히 관객 50여명은 줄지어 있었다. 저녁 8시 비로소 지난한 노동의 끝자락, 화려한 쇼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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