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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6.01 19:14 수정 : 2005.06.01 19:14



독일을 대표하는 가수 시인으로 한국에서 ‘독일의 김민기’로 불리는 볼프 비어만을 지난해 독일 브레멘 대학에서 볼프 비어만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류신 중앙대 강사가 만났다. 대담은 지난달 25일 서울 세종로 대산문화재단 접견실에서 1시간 가까이 진행됐다. 5월말 열린 대산문화재단의 ‘서울국제문학포럼’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한 비어만은 각국의 지성들과 함께 <가기 어려운 길들>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고통스럽더라도 우리가 그 길을 가야하는 것은 그 길, 즉 통일 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게 그가 전하려 한 메시지다.

통일은 미친 짓이다 통일을 안하는건 더 미친 짓이다

동독체제 비판 시·노래 억누를수록 저항의 힘
체제 단물 삼킨 이들 통일 수혜자로 변신 모순
통일은 힘들길…다리도 가슴도 머리도 아플것

류신= 당신은 적극적인 유태인 공산주의자 가정에서 성장해 어릴 때부터 공산주의적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을 배웠다. 당신의 삶과 문학에 각인된 반파시즘적 투쟁, 정치적 앙가주망(참여)은 이미 모유를 통해 습득된 것으로 볼 수 있나.

비어만= 나는 ‘갈색’ 모유를 마시면서 크지 않았다. 갈색은 나치를 상징하는 색이다. 내가 히틀러의 가슴이 아니라 내 어머니의 가슴에 매달려 있었던 점은 큰 행운이었다. 어머니는 노동자였고 공산당 당원이었다. 아버지 역시 강직한 공산주의자였다. 아버지는 공산주의를 통해서 인류를 해방시키려고 파시즘에 저항하다가 아우슈비츠에서 살해당했다. 어머니는 나를 ‘꼬마공산주의자’로 키우려는 욕심이 있었다. 이미 나치시대에 나는 어머니로부터 동요가 아니라 공산주의 혁명가요들을 배웠다. 어머니는 매일 7시에 공장에 갔고 아버지는 감옥에 있었다. 8시 반에 이모가 나를 데리러 올 때까지 1시간 반 동안 난 늘 혼자 침대에 앉아 내가 배운 모든 노래를 불렀다. 때문에 난 우리 집에 같이 사는 사람으로부터 ‘꼬마가수’라는 별명을 갖게 됐다. 어머니는 내가 공산주의자로서 인류를 구원하는 일을 하길 원했다, 그래서 나는 16살 때 동독으로 넘어갔다.

인류해방 꿈꾼 ‘꼬마 공산주의자’

류신= 스탈린주의에 의해 기형화된 현실 사회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시와 노래 때문에 11년 동안 당의 집중 감시를 받으며 출연 및 출판금지를 받았다. 무대에 설 수 없는 ‘거실 노래쟁이’로 밖에 달리 활동할 수 없었던 이 시기에 대한 지금 당신의 소감은.


비어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아주 좋은 시절이었다. 사실 나는 당시 고립되어 있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보다 친구가 더 많았다. 온 세계에서, 동과 서에서 많은 사람들이 내 집을 찾아 왔다. 물론 나는 책을 출판할 수도 음반을 낼 수도 없었다. 하지만 서독에서보다 동독에서 내 노래들은 인기가 있었다. 사람들은 내 시를 필사해서 유포했다. 정치경찰에 들킬까봐 떨리는 손으로 시를 적는 것은 서점에서 돈을 내고 시집을 사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저항의 효과가 있었다. 그리고 불법 복제된 테이프로 나의 노래를 들을 땐 밀고자인 이웃이 듣지 못하도록 꼭 창문을 닫아야 했다. 그들은 볼륨을 낮추고 내 노래를 들었지만 내 불온한 노래는 콘서트 무대에 설치된 대형 스피커보다 훨씬 더 자극적이고 시끄러운 소리로 그들의 폐부를 깊숙이 찔렀다. 그래서 결국 나는 서독으로 추방당했다.

류신= 1976년 당신의 시민권 박탈사건으로 인해 동독은 체제의 도덕적 정당성에 심각한 손실을 입게 되었고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 까지 이를 완전히 회복할 수 없었다. 당신의 추방사건을 ‘동독몰락의 실제적 시작’이라 해석하고 싶은데.

비어만= 옳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기타를 들고 있는 젊은이 하나를 내좇는다고 해서 무너지는 국가는 없다. 하지만 일리 있는 말이기도 하다. 동독 정권에게 충격적이었던 것은 내 추방 자체보다 추방조치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항의였다. 동독의 위정자들은 나를 추방시키면 계급의 적인 서독 쪽에서 분명 항의가 있을 거고, 언론이 앞 다퉈 떠들어댈 것이라고 짐작했을 뿐이다. 한 차례 쓰나미가 휩쓸고 가겠지만 곧 전처럼 모든 상황이 ‘정상화’될 걸로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동독 내부에서 예상치 못한 반발이 일어나자 그들은 깜짝 놀랐다. 그것은 정치적 대충격이었다. 유명한 작가들뿐만이 아니라 사상처음으로 일반인들까지 내 시민권 박탈 사건에 항의했던 일은 통치자들의 시각에서 봤을 때 훨씬 더 위협적인 일이었다. 이때부터 동독은 금이 가기 시작했다.

류신= 당신이 스스로 선택한 ‘조국’ 동독이 지구상에서 사라질 때 느낌은.

비어만= 놀라웠다. 기적처럼 느꼈다. 왜냐하면 동독이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동독은 나보다는 더 오래 살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동시에 착잡했다. 동독을 더 좋은 사회로 만들기 위해 동독을 비판하다가 그 동독이 붕괴되는데 일조를 한 자가 바로 나란 생각을 하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동독을 무너뜨리는데 내 시와 노래, 나의 삶 자체가 어느 정도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다.

▲ 독일의 김민기’로 불리는 볼프 비어만이 지난달 25일 서울 세종로 대산문화재단 접견실에서 류신 중앙대 강사와 대담하고 있다. 황석주 기자 stonepole@hani.co.kr



류신= 동독시절 당신은 사회주의 유토피아를 향해 대담한 비상을 꿈꾸던 혁명적 ‘이카루스’였다. 하지만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당신은 이카루스의 아버지 ‘다이달로스’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찾고 있다. 왜 그런가.

비어만= 다이달로스는 이카루스와 달리 엉터리 파라다이스를 꿈꾸는 몽상가나 광신자가 아니다. 다이달로스는 제임스 딘과 같은 매력적인 인물도, 인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예수도 아니다. 다이달로스는 자신의 아들 이카루스가 추락해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도 계속해서 살아가야만 하는 천형을 짊어지고 산다. 정치적으로 말하자면 공산주의 유토피아에 대한 유치한 믿음 없이 더 나은 세계를 위해 계속 살아가야만 하는 자가 바로 다이달로스이다.

류신= 독일통일 10년을 결산하는 당신의 노래에 이런 인상적인 부분이 있다. “독일과 독일은 다시 하나가 됐지만/난 지금도 갈기갈기 찢겨있네.” 이 시구가 의미하는 바는.

비어만= 내 마음이 아픈 이유는 동독이라는 절대주의적인 체제의 통치자들, 즉 내 ‘충실한 적’들이 통일의 수혜자로 둔갑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나를 감시하던 국가안전부 간부들은 지금 연금으로 안락한 생활을 하고 있다. 구동독 관료들은 통일 이전 민중들로부터 빼앗는 것을 사적 소유물로 당당히 소유하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을 도둑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통일 이후 새로운 엘리트가 되었다. 동서독 위정자들은 서로를 껴안아주며 통일을 완성했다. 이점이 내 가슴을 찢어 놓는다.

류신= 통일을 준비하고 있는 우리에게 해줄 말이 있다면.

비어만= 프랑스 속담에 “사전에 경고 받은 자는 두 배로 강해진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나는 한국인들에게 감히 경고한다. 통일은 정말 상상하는 것보다도 훨씬 끔찍한 일이 될 것이다. 경제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아주 값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통일 전보다 서로 더 싸울지도 모른다. 통일됐을 때 남북한 모든 사람이 서로 실망하고 불만족해 할 것이다. 북쪽 사람들은 ‘독재의 편안한 묽은 스프’를 그리워할지 모른다. 그땐 스스로 책임 져야 할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남쪽 사람들 또한 자신이 부당하게 약탈당했다고 실망할 것이다. 통일은 미친 짓이다. 그러나 통일을 이뤄야만 한다. 다른 길이 없다. 지금까지 내가 말한 것들보다 더 악의적인 것은 바로 통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힘든 길이 될 것이다. 다리도 아프지만 가슴도 머리도 아플 것이다.

희망과 절망의 팽팽한 긴장 견뎌라

류신= “희망을 설교하는 자, 거참, 거짓말쟁이지, 하지만/희망을 죽이자, 개자식이야/난 두 가질 다하지” 한국을 방문해 열창한 노래 <멜랑콜리(우울, 우수)>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이다. 당신의 삶과 문학을 설명할 수 있는 핵심 키워드는 ‘멜랑콜리’인가.

비어만= 맞다. 하지만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내가 말하는 멜랑콜리는 일차원적인 슬픔이나 우울증이 아니다. 멜랑콜리는 극단적인 감정의 모순, 말하자면 ‘이유 있는’ 절망과 ‘이유 있는’ 희망 사이의 긴장에서 비롯된다. 물론 양편 중 어느 한 쪽으로 경도될 위험성은 늘 있게 마련이다. 즉 헤어 나올 수 없는 어두운 좌절의 구렁텅이에 빠지거나 바보 같은, 어리석은, 몇 푼 안 되는 희망의 광기에 빠질 그런 위험이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절망과 희망의 어느 한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고 둘 사이의 팽팽한 긴장을 온 몸으로 견뎌낸다면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이태리 네오 막시스트인 안토니오 그람시가 멋진 말을 했다. “지성의 비관주의와 행동의 낙관주의. 희망과 절망 사이의 모순을 간직하라.” 정말 마음에 드는 말이다.

정리/류신 중앙대 강사, 번역/강미노 서울대 정치학과 박사과정


볼프 비어만(Wolf Biermann)

동독 선택→동독 비판→서독 추방→서독 풍자→독일 참여시인

1936년 함부르크에서 태어난 뒤 동독을 조국으로 선택해 이주했으나, 동독 체제를 맹렬히 비난하는 시와 노래 때문에 1976년 서독으로 추방당했다. 서독에 와서도 사회주의자로서의 신념을 지키며 서독 사회의 모순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풍자하는 참여 시인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주요 시집으로 <철사줄 하프>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혀로> <프로이센의 이카루스> <거꾸로 돈 세상, 나 그것 보기 즐겁네> 등. 게오르크 뷔히너 문학상(2001), 하인리히 하이네 문학상(2003)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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