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6.01 19:25
수정 : 2005.06.01 19:25
지난주 이 지면에서 인정옥은 황우석을 찬미했다. 그 전까지 좋은 천재과학자로만 생각하다가 그 글을 보고 황우석이 우리 시대의 진정한 영웅이 됐음을 알게 됐다. 이 글은 인정옥의 글에 고무받아 쓰는 그것의 하편이다. 여기선 황우석이라는 인물과 그의 성취를 더 잘 말할 수 없지만, 그가 영웅이 되는 과정이 드러내는 우리의 어떤 결핍을 말하려 한다.
그가 근대의 산업적 영웅이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정보공학(IT)과 함께 21세기 산업의 양대 총아인 생명공학(BT)에서 황우석이라는 개인에 의해 첨단의 비약이 이뤄지는 순간, 그래서 그의 연구가 미국 학자에 의해 ‘산업혁명’이라고 마침내 불려지는 순간, 고전적 산업혁명의 연대기에서 배제됨으로써 지울 수 없는 우리의 낙인이 된 저개발의 기억은 이제 삭제되어도 좋을 것이다. 국가가 그의 연구를 무제한 지원하겠다고 발표하고, 대기업들이 그의 앞에 줄서기 위해 안달하는 건 존경이 아니라 산업적 계산의 산물이다.
황우석은 또한 의심할 바 없는 민족 영웅이다. 물론 그 토대는 그의 산업적 능력이다. 오만방자한 부시의 “줄기세포 연구는 제한돼야 한다”는 발언에 “난치병 치료를 위한 연구를 개인이 막을 수 없다”고 받아칠 때 그는, 복잡한 국제정치학적 고민을 경유하지 않고도 최강대국의 최강자에 당당히 맞설 수 있는 결기와 능력의 소유자다. 황우석은, 그런 결기를 가졌으되 그런 능력을 갖지 못한 불운한 민족 영웅의 긴 대열 끝에 탄생한 신세기 민족 영웅이다.
가장 의미심장한 건 그가 지식인의 빈 자리를 완벽하게 대체하는 인물로 떠올랐다는 점이다. 지식인은 공동선을 향해 지식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황우석은 한때 불분명한 의미로 남용됐던 신지식인의 전형이다. “못하니까 안하는 게 아니라 안하니까 못하는 겁니다”라고 외치며 국가에 의해 신지식인으로 한때 추앙됐던 심형래는 최선의 경우에조차 성공한 벤처사업가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발표된 그의 성취가 사실이라고 해도, 그것은 심형래 개인으로 귀속되는 것이었다. 황우석의 성취는 ‘난치병 치유’라는 휴머니즘적 목적과 결부됨으로써, 공동선에 직결되는 가치로 받아들여진다.
이 세 가지 영웅적 면모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한때 교수 임용에서 탈락한 불운한 개인사와 그의 기품 있는 외모와 결합돼 미디어 영웅의 완벽한 조건을 만들어낸다. 그러니 그가 학장을 맡을지 여부까지 공공의 의제로 전환된다.
이 지점에서 어쩔 수 없이 전통적 지식인의 무기력, 혹은 문화의 탈 공동체성을 떠올리게 된다. 혼돈과 불안에 빠져있을 때 우리가 신뢰하고 귀 기울였던 지식인 집단이 1980년대까지 있었음을 기억하고 있다. 개별적으로 분투하는 지식인은 여전히 있지만, 그들의 지적 실천은 개별적 발화와 개인적 스타일로 호소할 뿐이며, 지식인 사회는 해체됐다. 공동선의 문제는 문학에서도, 가장 활발한 문화 영역인 영화에서도 고민되지 않는다. 최근의 한국 대중영화는 자기 불행의 원인을 지목할 때를 제외하고는 공동체를 불러오지 않는다. 공동선은 여전히 도착하지 않았는데, 그를 향한 지적 문화적 실천은 사멸해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우려가 있다. 황우석의 성취는 개인의 숭고한 목적과는 무관하게 그 자체가 공동선을 향해 있지 않다. 그것은 사회적 관계를 매개로 실현된다. 나는 종교적인 생명윤리 논쟁에 참여할 의도나 식견은 없다. 다만, 기초적인 질문들은 가능하다. 그의 성취가 부유한 불치병환자와 가난한 불치병환자에게 공히 구원이 될 수 있을까. 혹은 그의 기술이 대기업, 나아가 신자유주의와 결합함으로써, 진중권이 우려하는대로 반인반수의 괴물이 탄생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우리 사회는 이 문제에 대한 답을 갖고 있기나 한 걸까. 황우석이라는 한 고결한 학자에게 그것마저 짐지움으로써 해결하라고 해야 하는 걸까.
황우석의 영웅됨은 한국사회의 지식인적 문화적 실천의 결핍을 증거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시급하게 요청하는 사건이다.
허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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