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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6.08 17:20 수정 : 2005.06.08 17:20

유일하게 남은 화성 행궁의 옛 건물인 낙남헌과 앞뜰. 200여년전 정조시대 임금과 양반, 백성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잔치마당의 무대였지만, 현재는 엉뚱하게도 반공소년 이승복 동상 등이 들어선 우스꽝스런 공간으로 변해 버렸다.

(21) 화성 낙남헌

“천세(만세)! 천세!”

210년전인 1795년 윤 2월14일 아침 경기도 화성 수원(행궁). 정조 임금이 건설한 신도시 수원에 임금의 임시거처로 지어진 행궁의 한 전각에서 신하들과 이 지역 촌로들은 정조 임금의 덕과 장수를 빌면서 연거푸 건배의 함성을 터뜨렸다. 전날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뒤주에 갖혀 죽은 사도세자의 부인)의 회갑 잔치를 행궁에서 벌인 뒤 현지 노인들을 위로하고자 베푼 양로잔치 자리였다. 초청된 이들은 70살을 넘긴 연로한 조정의 중신 14명과 관내의 노인 384명. 노란 비단 손수건을 지팡이에 매고 자리에 들어서는 노인들을 정조는 일어서서 맞았다. 술을 세번 돌린 뒤 친히 이런 내용의 시를 짓고 화답을 청했다.

‘학처럼 흰 머리에 비둘기 머리 모양의 지팡이 짚고 앞뒤로 모였으니/ 우리 나라의 화평한 기운 가득한 낙남헌의 잔치로구나/ 바라노니 여러 노인들 오래오래 사셔서/ 우리 어머님 만년토록 사시도록 축하해 주시기를’

초청한 노인들 중에는 양반은 물론 상민도 있었으니, 정조의 이런 배려는 역대 어떤 군주에게도 없던 파격이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정조는 구경하는 일반 노인들에게도 술과 음식을 대접하라고 이르며 “상서로운 일에는 사람이 많을수록 좋다”고 말한다. 뒤이어 구경꾼들도 열을 지어 앉은 뒤 음식을 나눠먹고 함께 일어나 다른 참가자들과 춤추면서 만세를 외쳤다.

이 흐뭇한 잔치는 1795년 윤 2월 9~16일 정조가 어머니의 회갑을 맞아 부친 사도세자의 묘인 현륭원을 돌아보고 잔치 등을 벌인 일정을 상세히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에 나와있다. 그 잔치의 장소로 정조의 시에서도 거명되는 낙남헌이라는 건물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조가 백성을 위한 위민 정치를 가장 극적인 방식으로 실천했던 주무대이기 때문이다.

높은 담을 둘렀던 다른 행궁 건물들과 달리, 낙남헌은 행궁 서북쪽 끝에 툭 삐져나온 채 넓은 광장을 펼친 독특한 얼개를 지녔다. 앞뜰도 담장이 아니라 나무살로 만든 이동식 울타리로만 감쌌다. 언제든지 울타리만 걷으면 백성들과 만나 소통할 수 있는 구조다. 그러면서도 계단 좌우 소맷돌에 구름 무늬를 세겨 왕가의 권위를 살렸다. 국사학자 유봉학 한신대 교수는 “우리 왕조사에서 백성과 군왕의 만남을 위해 이렇게 특수한 공간을 만든 것은 전례가 없다”고 말한다.

실제로 1795년 정조와 혜경궁 홍씨의 을묘원행 기록의 백미인 <화성능행도> 팔폭 가운데 세 폭이 낙남헌 행사를 담고 있다. 특별 과거를 치르는 장면인 ‘방방 도’와 ‘양로연 도’, 정조가 근처에서 활쏘기를 한 뒤 백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불꽃놀이 하는 광경인 ‘득중정어사 도’가 그것으로, 임금과 백성이 어우러져 대화하고 축제를 즐기는 정경을 묘사한 작품이다. 1796년 10월 화성 낙성을 축하해 마련한 잔치도 낙남헌에서 벌어졌다. <화성성역의궤>에 실린 ‘낙성연 도’를 보면 전각과 바로 아래 특설무대에서 채제공 이하 재상 관료들이 궁중 무용을 감상하고 있고, 단 아래에서는 민중들이 재인패들의 동물탈춤을 흥겹게 즐기고 있다. ‘행사를 널리 알리고 다양한 놀이를 마련해 상하가 함께 즐기도록 하라’는 당시 행사 공문서 내용을 봐도 낙남헌은 18세기 애민사상의 공간적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셈이다.

하지만 20세기 초 일제가 다른 행궁 건물들을 모두 철거하고 병원과 경찰서, 학교를 지으면서 낙남헌은 외톨이로 남아 수원군청 서무계 사무실로 바뀐다. <화성성역의궤>를 보면, 행사 마당이었던 낙남헌 앞 뜨락은 천평 정도의 넓은 공터이며, 주위에 인공섬을 둔 작은 연못도 있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신풍 초등학교가 들어서면서 그 정취는 사라져버렸다. 낙남헌의 수난은 해방 뒤에도 이어졌다. 1970년대 유신 정권 시대에 시멘트와 구리로 만든 반공소년 이승복 동상과 이순신·세종 동상, 독서하는 소녀상 등의 기념물로 그 위에 충효원을 조성했기 때문이다. 이 뜻 깊은 곳에 반공소년의 동상과 날카로운 칼 같은 콘크리트 충효탑을 들이민 풍경은 블랙 코미디에 가깝다. 최근에는 정조시대 명필 조윤형의 원래 현판대신 획이 사그러든 모조 현판을 달아놓았다. 한 문화재 전문가는 “18세기 문화 시대가 지금 우리의 속성 문화와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보여주는 엽기적 풍경”이라고 했다.

글·사진 수원/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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