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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6.08 17:26 수정 : 2005.06.08 17:26

눈에 뵈는듯…손에 잡힐듯…소리를 조각하는 남자

감동이 있는 작품은 공연이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잔향이 남는다. 일반 관객들이 기억하는 부분은 대부분 특정 연기자이거나 극적인 내용, 또 더러는 음악이나 독특한 무대이기 쉽다. 그러나 감동을 자아내는 데 빼놓을 수 없으면서 공연이 끝난 뒤는 아무런 흔적이 남지 않는 것이 있다. 소리다.

음향 보조로 출발 20년 외길
“관객 울려야지 맘 먹으면
그 장면서 관객들 울어요”

국립극장 무대예술과 음향효과실의 오진수(47) 주임은 그런 소리를 만들고 다듬는 사람이다. 그는 흔치 않은 직업인 음향 디자이너로 20여년 한길을 걸어왔다.

그가 말하는 음향 디자이너는 “어떻게 하면 소리를, 그 감정을 관객들에게 그대로 전달할 수 있을까” 늘 고민한다. 다시 말해 ‘객석에 소리를 자연스럽게 되돌려주는 일’이 음향 디자이너의 역할이다. “만약 공연 중에 폭포 장면이 있는데 실제 무대에서는 폭포가 등장하지 않지만 음향효과라면 마치 천정에서 객석 위로 폭포가 쏟아지는 느낌을 줄 수 있지요.”

국립극단이 오는 12일 독일 만하임 쉴러 페스티벌의 초청공연을 앞두고 지난달 초 국립극장 해오름 무대에 올렸던 실러의 <떼도적>은 소리가 무척 많아 까다로운 작품으로 꼽힌다. 또 워낙 무대가 큰 탓으로 배우들과 악사들까지 마이크를 사용해야 했는데 특히 모러 백작(장민호)이 성안에 갇혀 불평을 토해내는 소리나 악사들이 연주하는 정가의 청아한 구음소리 등은 자연스러우면서 입체감이 뛰어났다. “공간감을 주기 위해 해오름 극장의 73개 마이크 모두를 사용해서 목소리를 가공했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 1984년 국립극장에 입사하면서 <도미부인> 공연 때 음향주임 공성원씨 밑에서 음향 보조로 첫발을 내디뎠다. 전자를 전공했다는 이유였다. 처음에는 음악에 대해서 아는 게 없어 무척 힘들었지만 독학으로 음향공부를 하고 사설학원에도 다니면서 ‘소리’에 적응해나갔다.

그러다 소리에 ‘감’이 잡히면서 88년 3월 국립발레단의 <노틀담의 곱추>, 9월 국립무용단의 <하얀 초상>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음향 디자인을 전담하면서 90년 ‘음향실장’ 자리까지 올랐다.


“지금은 기본적인 효과음향이 많이 확보되어 있지만 90년 초까지는 거의 릴테이프에 의존해야만 했어요. 레퍼런스 시디가 없었기 때문에 비오는 장면은 콩을 멍석 위에 떨어뜨려 소리를 만들곤 했죠. 또 바람소리는 두꺼운 천을 나무 판조각으로 훑어내렸고, 천둥소리는 넓은 구리판이나 함석판을 매달아서 마구 흔들어서 소리를 확보했어요.”

그는 지난 20여년 동안 400여개에 이르는 작품을 해오면서 “같은 장면이라도 음향 조작에 따라 관객들의 심리변화와 감동의 정도가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나 스스로 작품에 심취해서 내가 오늘은 이 장면에서 관객들의 눈물을 내게 하겠다고 마음 먹으면 분명히 그날은 관객들이 웁니다.”

그는 음향 디자이너는 “생방송이기 때문에 항상 긴장 속에서 지내야 하지만 공연 막이 내리고 객석을 떠나는 관객들의 표정에서 어떤 감동의 느낌을 읽을 때 가장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글 정상영 기자 chung@hani.co.kr 사진 김태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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