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6.15 20:19
수정 : 2005.06.15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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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팔경의 하나라는 서호(축만제)의 해지는 풍경. 농업진흥청 건물이 기슭에 들어선 여기산의 해넘이를 뒤로 하고 축만제 옛 표석이 쓸쓸히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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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서호와 만석거
‘…경비를 백성에게서 거두지 않고/ 수확한 작물을 뺏지 않기 위해/ 임금이 손수 사비 이백만 전을 내었고/ 땅의 이익을 버리지 말되 억지로 기르지 않아서/ 논 서른 아홉 경을 얻었구나/ 화성 백성들의 양식을 넉넉하게 하기 위하여/ 주위 경관을 고쳐 좋게 하고/ 이에 사방이 온통 비단 두른 듯 하여/ 갑자기 온 들이 푸른 거울 같이 되었네…’
1796년 수원땅 화성 북녘에 저수지 만석거를 파고 지은 정자 영화정 낙성 당시 관료 홍원섭이 지은 상량문 일부다. 척박한 황무지를 푸른 옥토로 만든 만석거 호수 주변의 그윽한 경관을 칭송한 이 상량문은 호수 건설을 지시한 정조 임금의 예사롭지 않은 뜻을 암시한다. 부친 사도세자의 묘역인 현륭원을 지키는 배후도시로 건설한 신도시 화성을, 오로지 왕의 능력으로 백성들이 먹고 살 걱정 안 해도 되는 유토피아적 농경도시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화성하면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성곽과 최근 복원한 행궁만을 떠올린다. 하지만 역사학자들은 그 성곽 북쪽과 서쪽에 있는 두 개의 큰 저수지인 만석거와 서호(축만제)를 빼놓고는 화성의 진정한 의미를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이 두 곳은 우리 농업사에서 근대지향적인 혁신적 농업행정의 시발점이 된 곳으로 역사적 의미를 둘 만하다. 조선 후기 들어 모내기 법이나 이모작 재배가 보급되고 수리기술이 발전하면서 국가차원에서 농정을 혁신해야 한다는 요구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정조는 화성 부근의 너른 들녘에서 이런 저수지 건설을 통해 농업 혁신을 꿈꾸었던 것이다.
오늘날 일왕 저수지로 불리우는 만석거는 정조 19년인 1795년 2월 착공돼 석달만에 완성된 대형 농경용 저수지다. 1794년 말 전국적인 가뭄과 기근 때문에 화성 공사를 잠시 중지하면서 애민군주인 정조가 백성들이 연명할 대책을 찾기 위한 고민 끝에 땅 개간(대유둔)과 저수지 건설을 결정한 데 따른 것이다.
그가 얼마나 백성들의 생계와 민폐를 우려했는지는 당시 내려보낸 공문 지시사항인 화성성역의궤의 ‘절목’을 보면 알 수 있다. 정조는 “땅의 이익이 일어나고 백성의 일이 마련되고 사람 사이의 화합이 있게 되어서야 풍년이 자주 드는 것”이라며 이렇게 지시하고 있다. “ 대궐에서 내린 돈 2만 냥 속에서 1만2660냥은 논 사고 논 만드는 비용으로 냈다. 대개 이 둔전을 설치한 것은 오로지 성의 백성들의 일을 만들어주려는 큰 뜻에서 나온 것인데, 경작자에게 나눠 줄 때는 먼저 아전과 관의 노비로부터 성안의 백성들까지 그 힘에 따라 원하는 대로 나누어주라. ….농토를 감독할 도감과 마름 권농 사령은 사래논을 나누어주고 세금 없이 갈아먹도록 하여 의지해 살도록 하라. …”
만석거는 둘레가 1022보(1보는 1216㎝), 길이가 875척(1척은 30.3㎝)이며 너비가 850척이었는데, 주위 수목과 어우러진 빼어난 경관으로도 유명했다. 연꽃이 심어진 호수와 둘레의 정자 영화정, 그리고 나무다리인 여의교는 수원의 봄, 가을 팔경으로 널리 알려졌고, 정조는 수원 행차 때마다 만석거의 푸른 물과 누른 들을 보며 흐뭇한 감회에 젖었다. 게다가 만석거 농토인 대유둔에서 경작을 잘 하면 관리직 벼슬을 주는 조건으로 신분상승의 기회도 열어 놓았고 부호들의 농업투자도 적극 유치하려 했다. 실학자들의 혁신적인 농정 개혁이론을 신분사회의 한계 속에 실천해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셈이다.
이런 개혁농정은 1799년 더욱 큰 규모로 열매를 맺었으니 수원 서쪽 서둔동에 만석거의 2배 크기로 조성한 축만제(서호)와 서둔토가 그것이다. 이 곳은 만석거의 성과를 바탕으로 본격적으로 운영된 국영 농장격이었다. 서호 또한 수원 팔경의 하나로 꼽히면서 중국 항조우 서호에 버금갈 정도로 그 경치가 사대부들의 사랑을 받았다.
축조 200주년인 1995년, 만석거는 택지 개발을 이유로 3분의 1이 매립됐으며 서호 또한 이듬해 상당 부분이 매립되는 아픔을 겪었다. 만석거의 정자인 영화정은 본래 위치에서 크게 벗어나 마치 유원지 부속 시설처럼 바뀌었고, 만석거 표지석은 매립 과정에서 사라져 버렸다. 오늘날 농촌진흥청과 서울대 농대 등의 근대 농업 관련 시설들이 수원에 자리잡게 하는 계기가 되었던 서호와 국영농장 서둔토 또한 그 의미가 묻혀져 가고 있다. 서호 인근에 세운 정자 항미정은 문틀도 없이 쓰레기가 널린 채 방치되고 있고, 농업진흥청이 정조가 아닌 일본인들이 근대 권업 농장을 꾸린 1906년을 한국 근대 농정 100년의 기점으로 잡고 100년사와 심포지엄 등을 준비하는 서글픈 현실이 또한 그렇다.
수원/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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