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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6.17 16:18 수정 : 2005.06.17 16:18



국민이 주인인데 권력에 눈치볼일 있겠소?

“한겨레신문의 모든 주주들은 결코 돈이 남아돌아 투자한 것이 아니요, 신문다운 신문, 진실로 국민 대중의 입장을 대변해주는 참된 신문을 갈망한 나머지 없는 호주머니 돈을 털어 투자한 어려운 시민층이므로 이 신문은 개인 이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재래의 모든 신문과는 달리 오로지 국민 대중의 이익과 주장을 대변하는 그런 뜻에서 참된 ‘국민 신문’임을 자임한다.”

1988년 5월15일 창간호 1면에 실린 창간사이다.

<한겨레>는 창간 이래 지난 17년 동안 지면에서 이 창간 정신을 구현해 왔다. 수많은 특종기사와 기획기사를 통해 권력의 방종과 부패를 막고 분단의 모순을 고발하는 동시에 민족 화해의 기운을 북돋웠으며, 경제 민주화에 기여했다. 이 모든 것은 바로 한겨레가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된 신문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시대 양심선언들의 방패되고 옷로비등 권력의 한복한 파해쳐가며 언론개혁 운동의 첫 돛을 올렸다.
친북언론이란 올가미를 쓰면서도 평양에 첫발을 내딛던 순간의 감격, 환경과 인권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
시시때때 시련도 있었지만 당신의 격려가 날 이만큼 키웠소

권력에 맞선 양심선언의 성소


▷ (사진설명) 문민정부 당시 소통령으로 불리며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던 김영삼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씨는 끈질긴 추적보도 끝에 법의 심판을 받았다. 현철씨는 <한겨레> 보도를 상대로 20억원의 거액 명예훼손 소송을 냈다가 스스로 취하하기도 했다. 1997년 05월 서울구치소에 수감중인 김현철씨가 20일 오전 검찰의 보강수사를 받기 위해 수의를 입고 포승에 묶인 채 지하통로를 통해 검찰청사로 들어서고 있다. 강재훈 기자

군사정권이 청산되지 못해 언론의 자유가 여전히 억눌리던 시절 <한겨레>는 폭압적 권력에 외로이 맞선 양심선언의 절대적 보호자였다. 다른 신문과 방송들이 권력의 눈치를 살피느라 할 말을 제대로 못했던 탓에, 우리 시대의 의인들은 <한겨레>로 몰렸다. 1990년 5월 감사원 비리를 고발한 이문옥 전 감사관, 1990년 10월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을 폭로한 윤석양 이병, 1992년 4월 14대 총선 당시 군부재자 투표부정을 증언한 이지문 중위 등이 대표적 사례다. 또 악명 높은 ‘고문 기술자’ 이근안의 실체도 1988년 12월 <한겨레>를 통해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이씨는 한겨레 보도 이후 11년 동안 도피생활을 하다가 1999년 검찰에 자수했고 결국 법의 엄정한 심판을 받았다.

“성역은 없다” 최고권력자에 대한 끈질긴 감시

<한겨레>는 정권의 비리에 대한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문민정부 당시 ‘소통령’으로 불리며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들 현철씨는 한겨레의 끈질긴 추적 보도 끝에 결국 숨겨진 비리가 들통났다. 한때 김현철씨는 한겨레를 상대로 20억원이라는 거액의 명예훼손 소송을 내는 등 진실 보도를 막으려 했으나, 한겨레는 압력에 굴하지 않았다. 진실이 밝혀지자 김현철씨는 소송을 스스로 취하했고 김 전 대통령은 국민 앞에 사과를 했다. 이는 대통령 아들에 대한 언론의 첫번째 경고가 됐다.

일부에선 김대중 정부 이후 <한겨레>가 ‘여당지’로 변했다고 주장하지만, 당시 권력 핵심부를 겨냥한 한겨레의 잇따른 특종보도들을 보면 이런 주장은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최고권력층과 그 주변의 치졸한 로비행태를 만천하에 드러낸 ‘옷로비 사건’은 1999년 5월 <한겨레>의 특종 보도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이와 함께 김대중 정부의 도덕성에 또하나의 결정적 상처를 입힌 ‘조폐공사 파업유도 사건’ 또한 그해 6월 나온 한겨레의 특종기사였다.

민주화 이후의 거대권력 ‘종교·언론’에 대한 비판

정치권력만이 아니었다. 언론과 종교 등 본분을 망각하고 힘을 남용하는 권력에 대해 한겨레는 늘 엄정한 비판의 칼날을 겨누었다.

1994년 4월 서의현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이 3선 연임을 밀어붙이면서 조계종 내분 폭력사태가 벌어졌다. 한겨레는 당시 조계사 부근 호텔과 여관을 모두 뒤져 서 원장쪽이 돈을 대 폭력배들을 동원한 사실을 밝혀냈다. 서 원장은 결국 불명예 퇴진하고 불교계의 개혁으로 이어졌다.

언론개혁은 한국 사회의 중요한 화두가 되었지만, 이는 사실 한겨레가 창간 때부터 주도한 것이었다. 창간호 25면을 보면 신문과 방송의 권력과의 유착을 지적하는 따끔한 글이 실려 있다. 한국신문협회와 방송협회가 10월 유신과 광주민주화운동 무력진압, 언론 통·폐합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던 사실을 들추며 “민중을 외면하고 권력과 자본에 유착되어 특권계급으로 군림했다”고 지적한다.

한겨레는 이후 경품과 무가지로 오염된 신문시장과 보수신문들의 여론 독과점을 지속적으로 감시해왔다. 특히 2001년 초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등 족벌신문들의 권언유착과 사주의 비리 등을 파헤친 ‘심층해부-언론권력’ 시리즈는 서울 시내 가판에서 돈을 줘도 구하기 힘들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특히 일장기를 제호 위에 올리고 일본 왕과 일본을 찬양한 조선일보의 1940년 신년호 1면이 한겨레를 통해 공개되자, 많은 국민들은 조선일보의 민족지 주장의 진실을 알게 됐다.

민족의 화해를 위한 보도

<한겨레>는 창간 초기였던 냉전의 시대부터 민족의 화해와 교류를 위해 노력해왔다. 이를 위해 국가보안법 폐지를 줄기차게 주장해왔고, 국가보안법 때문에 고초를 겪기도 했다. 한겨레는 1989년 국내 언론 최초로 북한 취재 계획을 세웠다. 이에 안기부는 국가보안법을 적용해 리영희 당시 한겨레신문사 고문을 구속하고, 한겨레에 ‘친북 언론’이라는 올가미를 씌우려고 했다. 그러나 이는 전 국민적 저항을 불러왔고 국민들은 오히려 한겨레에 117억원의 발전기금을 모아주면서 성원했다.

실제로 방북 취재가 이뤄진 건 그로부터 5년 뒤. 1994년 9월 정연주 당시 워싱턴특파원(현 한국방송 사장)이 전송한 ‘본지 기자 어제 평양에’라는 감격적 기사가 실렸다. 이처럼 한겨레는 창간 이후 지금까지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한 언론이 되고자 노력해왔다.

환경에 대한 남다른 관심

<한겨레>는 ‘이곳만은 지키자’ ‘청계천을 살리자’ 등 장기 기획기사로 환경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기울여 왔다. 한겨레는 2002년 신년호에서 ‘청계천을 돌려다오’라는 기획기사와 박경리씨의 제언을 소개하며 ‘청계천 되살리기’를 사회적 의제로 처음 제시했다. 한겨레의 보도로 시작된 이 논의는 결국 청계천 복원 대역사로 이어졌다.

<한겨레> 안재승 기자 jsahn@hani.co.kr




발전기금 낸 풀뿌리 손긴들

한겨레 제2창간운동에 공감해 발전기금을 낸 대부분의 독자들은 창간 당시의 6만2천여 국민주주처럼 이름없는 시민들이다. 적게는 1만원에서부터 1000만원대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형편에 따라 다양한 액수로 ‘한겨레 발전기금’에 참여한 풀뿌리 손길들로부터 이들이 한겨레에 돈을 낸 이유들을 들어보았다.

박아무개(은행원)씨 <한겨레> 같은 신문이 있어야 우리나라가 좋은 방향으로 나갈 수 있지 않겠나. 기존 한겨레 주주로, 자발적으로 100% 증자에 참여한 셈이다. 나 자신은 운동권과 거리가 멀고, 열렬한 진보주의자도 아니다. 창간 초기에는 진보적 논조에 대한 거부감도 많았지만, 한겨레를 통해 그동안 사회에 대한 이런 시각도 존재하는 구나를 체득했다.

진정수(방송사 프로듀서) 한겨레가 창간되던 당시에는 대학 1학년이어서 참여할 수 있는 형편이 못되었다. 이번에 좋은 기회를 만났다. 줄곧 구독해오다 잠시 중단했던 때도 있었지만 다른 신문에 만족할 수 없어 다시 보게 되었다. 한겨레도 젊은 사람들의 욕구를 다 담아내기에는 좀 부족한 듯하지만 한겨레가 해야 할 역할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윤경규 지난해 11월부터 구독했다. <한겨레>를 보다 보니 몰랐던 것을 많이 알게 되었다. <한겨레>가 어렵다는 얘기도 듣게 되었고, 주식을 살 수 없는가 알아보았다. 이런 계기가 생겨 기쁘다. 그동안 <한겨레>를 안 본 것은 다른 신문이랑 같을 것이란 짐작 때문이었다. 한겨레를 통해 소외된 쪽을 너무 몰랐다는 것을 알았다. 1백만원을 냈지만 기분이 무척 좋다.

김연식(대학교수) 어릴 때 정신적 자양분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는데 대학생 시절에 참여한 4주밖에 없었다. 이번에 빚진 마음을 갚을 수 있게 되니 반갑다.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신문이 하나는 있어야 하지 않겠나. 마이너스통장만 아니면 더 참여할 수 있었을텐데 안타깝다. 지금도 한겨레를 읽으면서 내가 커간다고 생각한다. 그럴 때 한겨레에 빚지고 산다는 생각을 한다.

차보경(교사) 기존주주다. 이번에는 남편과 각각 참여하게 되었다. 6개월 동안 <조선일보>가 어떤 신문인가 하고 구독한 적은 있지만, 줄곧 한겨레를 봐 왔다. 한겨레 없으면 안되겠더라. 신문은 수많은 사람이 읽고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을 제공하는 것이니 특별히 중요하다. 한겨레가 제2창간 해서 좋은 것 같다.

문상기(컴퓨터 개발자) 전부터 관심 많았다. 창간 당시 모금할 때도 대학생 형 통해 얘기 들었다. 이번이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또 한겨레가 어렵다고 해서 적지만 힘이 되었으면 참여하게 되었다. 앞으로도 변하지 않고 계속 잘 해줬으면 좋겠다.

정윤영(교사) 창간주주다. 창간때나 지금이나 배당 같은 거 받으려고 참여한 것 아니다. 어차피 시작한 것이니, 잘 되어야 하지 않겠나. 한겨레가 잘 되어야 나라가 잘 되지 않겠나. 더 많이 못 내서 안타깝다. 지금은 창간 때만큼 한겨레의 필요성을 절감하지 못하는 것 같다. 하지만 사람다운 세상, 성실한 사람이 잘 사는 세상을 만들자는 데 뜻이 같다.

노경준 제대한 이후 계속 <한겨레>를 구독했다. 신문 중에서 한겨레가 제일 낫다고 본다. 한겨레가 우리나라 신문 중 유일한 진보적 신문이다. 한겨레 발전기금이 주식으로 전환되니, 한겨레 주주가 된다는 자부심도 있다. 집사람 앞으로도 200만원 해서, 400만원을 냈다. 우리 형편으로서는 큰 돈이지만 아내도 흔쾌히 동의했다.

이영식 신문을 가끔 사봤는데 공정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올 1월부터 <한겨레>를 정식으로 구독하게 되었다. 신문별로 같은 사안을 다르게 보도하고 그 차이가 심하다는 것을 신문들을 비교하니 알게 되었다. <한겨레>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라는 것도 알았다. 조금씩 기부를 하고 있지만 언론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에 참여하게 되었다.

김근순 <한겨레>를 알게된 지 얼마되지 않는다. 리영희 선생의 <새은 좌우의 날개로 난다>를 읽고 보게 되었으니 1년도 안된다. 내 나이 칠십이지만 근래에 그분 책을 읽고 보고 새 세상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한겨레신문이 발행된 지 오래되었는데 이번에 발전기금 모금을 하는 것은 여러 사람에게 읽혀지지 않았기 때문 아닌가. 젊은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야 한다. 나는 들판의 이름없는 실뿌리다.

구본권 기자 starry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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