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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6.22 16:30 수정 : 2005.06.22 16:30

바티칸 비밀주의로 악보 원본 유실

클래식 전체를 통틀어 그레고리오 알레그리처럼 명성이 ‘경제적인’ 작곡가도 드물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 로마에서 태어나 훗날 교황청 음악악장이 된 그는 오로지 단 한 작품으로 인하여 자신의 이름을 고전음악계에 불멸로 등록했다. 다름아닌 ‘미제레레 메이’(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이다.

카톨릭계에서 이 음악은 교황청 시스틴 성당에서 행해지는 성 금요일날 저녁예배에 불린다. ‘테네브레’라는 이름의 이 예배는 촛불을 하나씩 꺼나가다가 ‘미제레레 메이’의 신비로운 합창 속에 마지막 촛불이 꺼지며 완전한 어둠 속에서 마무리된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 가사를 시편 51에서 발췌했다는 점이다. 한 점 얼룩없는 천상의 음악이 정작 담고 있는 줄거리는 다윗이 바세바와 통정한 뒤 참회하는 속세의 죄악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서는 수도사 윌리엄이 바로 그런 이유로 교황청에서 이 노래가 불리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기는 장면이 나온다.

음악 자체가 가지고 있는 환상적인 아름다움도 아름다움이지만, 이 합창이 유명해진 이유는 교황청이 이 음악의 악보를 봉인했기 때문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폐쇄적이었던 교황청은 이 음악의 악보가 외부에 공개된다든가 시스틴 성당 바깥에서 연주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시켰다. 이로 인해 악보가 정식으로 공개되기 전인 1770년까지 이 음악을 듣고자 하는 이는 바티칸까지 일부러 찾아와야만 했다. 이러한 칙령으로 인해 수많은 거장들이 시스틴 성당에 몰려들었는데, 그 가운데 한 명이었던 괴테는 <이탈리아 여행기>에서 이 경험이 얼마나 감동적이었던가를 언급하고 있다.

신동 모차르트도 ‘미제레레 메이’와 관련해 자신의 천재적인 재능을 유감없이 과시한 에피소드를 남기고 있다. 열네 살의 나이로 아버지와 함께 시스틴 성당에서 10분간에 걸쳐 진행되는 이 음악을 들은 모차르트는 단 두 번만에 바로 이 곡을 암기해 악보로 옮겨 적었다. 훗날 모차르트는 이 작품에 크게 영향을 받은 자신의 ‘미제레레 작품번호 85’를 작곡하기도 했다.

그 어느 세상이든 완벽한 통제란 없는 법. 1770년 알레그리의 ‘미제레레 메이’는 바티칸의 다른 악보들과 함께 마침내 영국 음악학자 찰스 버니에 의해 세상에 공개됐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이 악보의 사보는 흔하게 떠돌고 있었다. 대부분 암보에 의한 것이어서 성부라든가 멜로디에 차이가 있는데 사보가 더 흔하게 돌다 보니 결국 정통 작곡가에 의한 최초의 버전은 유실되고 말았다. 바티칸의 비밀주의가 낳은 안타까운 대목이다.

노승림 공연 칼럼니스트/성남문화재단 홍보부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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