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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화수류정과 버드나무 우거진 용연 연못의 봄날 정경이다. 오늘날 방화수류정은 문짝과 온돌이 뜯겨나갔고, 용연도 못 둘레와 못 안의 섬이 동심원 모양으로 잘못 복원되어 200여 년전 원형이 훼손되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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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버드나무와 벗하는 풍류가 어렸구나 요해처, 즉, 화성 사방을 다 굽어볼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이므로 누각을 지었다는 얘기다. 방화수류정의 본질은 감시용 군사 지휘소가 되는 셈이다. 1795년 윤2월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화성 회갑연을 앞두고 누각을 불과 45일만에 지은 것도 이런 경비 차원의 절박한 사정이 있었던 까닭에서 비롯되었다. 실제로 누각 동북쪽 난간 아래의 기단 속에 병사들이 주둔하는 진지방과 총 쏘는 구멍인 총안 19개가 뚫려 있다. 건축적 측면에서 방화수류정은 중국 청나라 북학 건축사조의 영향을 전통 건축과 결합시켰다. 주춧돌 위에 나무 기둥틀을 세운 뒤 그 사이를 벽돌로 채운 아래층은 십자 무늬가 반복되는 미감이 일품이다. 지붕 서까래를 고정시키는 기둥을 감싼, 지붕꼭지의 장식물인 절병통 또한 그러하다. ㄱ자꼴 평면에 사방에서 달리 보이는 팔작지붕 등의 화려한 외관과 엄중한 군사시설이 대비되는 이 누각은 마치 풋풋한 미모와 강한 완력을 겸비한, 강인한 낭자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정조 또한 이 누각을 극진히 사랑했다. 매년 화성을 들렀던 그는 행궁에서 방화수류정으로 산책하면서 화성축성의 성과인 북녘 만석거의 너른 논밭과 도심지 풍경을 흐뭇하게 감상하곤 했다. 1795년 혜경궁 홍씨의 화성 회갑연 때 문헌 기록을 보면 그는 방화수류정에 올라 화성 풍경을 굽어보며 방어에 편한 화성 성곽제도의 우수성을 자화자찬한다. 화성에 대한 높은 자부심을 털어놓은 것이다. 1797년 정월 군복을 입고 누각 층계 위에 올라가 화살을 쏜 뒤 정조가 남긴 시는 묵향 어린 방화수류정 풍류의 백미라 할 만하다. ‘봄날 성을 두루 돌아도 아직 해는 지지 않고. 방화 수류정의 구름 낀 경치 더욱 맑고 아름답구나/ 수레를 세워놓고 세번 쏘기가 묘하니/ 만 그루 버드나무 그림자 속에 화살은 꽃과 같네.’ 같은 해 추석 때는 조정 중신들과 달맞이 잔치를 했다고 왕족실록은 전하니, 이 때 정조는 자신의 시를 머리 속에 떠올렸을 것이다. 지금도 누각에 가면 당시 정조와 중신들의 잔치 자리배치를 짐작하는 재미가 있다. 임금은 남쪽을 보고 앉으므로 북쪽 누각의 튀어나온 퇴간이 정조의 자리이며, 그 아래 서남쪽으로 길쭉하게 이어진 공간이 중신들이 앉던 자리다. 방화수류정은 정조시대 문화정치의 쇠퇴와 운명을 같이 한다. 정조 사후엔 임금 행차가 끊어지고 지방관 연회장이 되었다가 일제시대 주민들의 행락공간으로 변질된다. 누각의 온돌과 창호문은 일제 때 뜯기고, 지붕의 절병통은 최근 꼭지가 날아갔다. 운치를 더했던 용연 연못은 20년대 대홍수에 휩쓸렸다가 70년대 원형을 잃고 정연한 동심원 모양의 못으로 바뀌었다. 지난 주말 찾은 누각 안에는 관광객들이 난간에 발을 걸치고 누워 코를 골고 있었다. 수원/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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